눈감고 고국의 모습 그리는 듯…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던 순간이던가. 꿈속에 그리던 고국행.
보고싶던 형제와 고국산천을 34년만에 찾아나선 체코교포 이기순씨에게 서울행 점보기의 이륙은 더디기만 했다.
지난달 30일 하오3시10분, KAL906편 좌석번호 20H에 앉아있는 이씨의 표정은 감격과 흥분으로 떨고있는 듯 했다. 옆자리의 이씨 남편 「베이체크」씨도 들뜬 모습이었다.
이번의 고국 방문으로 아내의 의로움이 덜어질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다는 그였다.
30일상오8시30분쯤 서울 본사로 보낼 파우치를 싸들고 KAL 파리지사로 막 나가려는 참에 본사의 긴급지시에 따라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게되었다.
비행기좌석부터 하나 확보하곤 드골공항으로 뛰었다.
다른일은 문제가 아닌데 기사송고가 걱정스러웠다. 원고지 10장이상은 불러야한다. 40분정도 기착하는 알래스카에서 그게 가능할까.
점보기가 고도를 잡고도 한참이 지난다음 이씨자리로 다가갔다. 남편 「베이체크」씨는 책을 보고 있었고 이씨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것도 같았고 고국의 새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전날 인터뷰로 낯이 익은 「베이체크」씨가 이씨를 흔들었다.
우리는 승무원에게 부탁해 조용한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
『저하고 서울까지 가시면서 지난 34년을 한번 더듬어 보시지요』이씨는 다시 눈을 감았다.
태극마크를 한 한국여객기를 타고 고국을 찾는 감상부터 묻자 그녀는 『그때는 이런 비행기가 없었지요』하며 말머리를 꺼냈다. 그녀는 감정을 억제하는 것같았다. 파리에서 알래스카공항까지의 8시간48분동안 이씨의 말은 거미줄처럼 끊이지 않았다.
알래스카에 도착하자 제일먼저 뛰어내려 전화통을 붙들였다. LA중앙일보지사는 곧 나왔다. 2백자원고지 12장정도를 불러주고 났을 때는 탑승마감 1분전이었다.
서울시간은 그때가 31일상오 7시30분. LA지사에선 팩시밀리로 즉각 기사를 서울 본사로 중계했다.
다시 비행기에 올라타서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1차목표 달성.
비행기가 이륙하자 이씨가 다시 옆자리로 찾아왔다. 그녀는 조금전 알래스카에 도착한 서울의 30일자 석간신문들을 펴보이며 『너무 크게 보도되었네요』라고 했다.
신문들은 큼직한 사진과 함께 이씨의 고국방문소식을 크게 싣고 있었다.
다른 이야기 끝에 체코에서 최은희·신상옥부부를 본적이 있는가고 물었다. 이씨는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들 이름조차 처음 듣는다고 했다.
김포공항 활주로가 창밖으로 보이면서 기내스피커에서 아리랑이 은은히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이씨는 눈을 감았다. 눈가가 반짝하는 것도 같다.
이씨의 딸「렌카」부부는 짐을 챙기며 지금 한국에선 수영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김포공항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