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7)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30)|협전 사수한 고의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동경미술학교에는 춘곡에 이어 두번째로 김관호가 입학하여 『석모』라는 졸업작품으로 전교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일본의 귄위있는 전람회인 문전에서 특선의 영예를 차지하였는데 귀국하여 잠시 활동하는듯 하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세번째로 김찬영도 김관호와 같이 중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두사람이 춘곡 연배이고 그밖의 사람은 모두 제자뻘 되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총독부주최의 미전에 춘곡은 2회 때부터 출품하지 않았다. 미전은 44년까지 23회나 계속되었고 많은 춘곡의 동료들이 총독부의 식민정책의 하나인 미전에 협력하였지만 춘곡은 이것을 거부하고 협전만을 사수하여 나갔다.
춘곡은 처음에 귀국해서는 중앙·보성·중동같은 중학교의 도화선생으로 다녔다. 그때 제자이던 서양화가 이마동은 『선생님은 도화시간이 되면 교실에 들어오셔서 교단위 의자에 앉으시면서 나를 그려라 하고 학생들에게 자신의 초상으 그리게 하시기가 일쑤였다』고 하였다.
이 도화선생도 젊은 사람이 나오자 양보해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그림만 그렸다. 그리고는 혼자의 힘으로 서화협회와 협전을 이끌어나갔다. 협전은 39년 총독부에서 해산을 명렴할 때까지 19회를 거듭했는데 그것은 진실로 고독하고 처절한 투쟁이었다. 서화협회는 재정난으로 유야무야로 껍데기만 남았고 협전에는 출품하는 서화가가 자꾸만 줄어갔다. 미전은 화려하고 관중이 많고 선전이 잘 되어 이름을 알릴 수 있지만, 협전은 장소도 좁고 설비도 보잘 것 없고 선전도 시원치 않아 관전인 미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전람회였다.
오직 한가지 조선사람 민간인이 해나간다는 것, 관전에 타협하지 않은 조선사람의 힘으로 해나간다는 것, 이것이 특색이었다. 그것은 화려한 일본 옷을 입은 젊은 여인 옆에 서있는 후즐근한 치마저고리에 머리를 쪽진 부인네와 같았다. 이런 옷차림의 부인네한테 사람의 눈길이 갈 리가 없었다. 그래도 춘곡은 이런 역경을 뚫고 억지의 강행군을 열아홉 해나 해나갔다. 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성고보나 휘문고보의 강당에서 열리는 협전에 들어가보면 구경꾼은 두서너 사람 밖에 없는 쓸쓸한 전람회장이었다. 춘곡회장 자신이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고 장석표라는 젊은 서양화가와 심산 노수현, 그리고 몇 사람이 전람회장을 지킬 뿐 한적한 전람회장이었다.
이렇게  막한 전람회를 해마다 꼭 열고 열사람이 구경오든 스무 사람이 구경오든 그냥 전람회를 해나가는 것이 열아홉 해에 걸친 춘곡의 고행이고 수절이었다.
생활은 몹시 곤궁해서 원동막바지 작은 집에서 그 아래 사는 심산 노수현과 또 그 아래 사는 일주 김진우와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날마다 술타령으로 지냈다. 비록 불 못 땐 냉방에서 조그마한 화롯불에 손을 쬐가면서 지낼지언정 이야기는 항상 호탕하고 기개에 차있어서 조그만큼도 궁색한 빛이 없었다.
어느 해 섣달그믐께 돈있는 친구가 연말도 되고 생활이 궁색하다는 말을 듣고 봉투에 얼마만큼의 돈을 싸가지고 원동 그집으로 갔었다.
역시 방은 냉방인데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는 중에 춘곡의 태도가 어찌나 호탕하고 늠름한지 이 돈으로 궁색을 면하라고 봉투를 내놓을 수가 없어서 그냥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구김살 없이 언제나 태연하고 흔연하게 사람을 대하였다.
어느 술좌석 술상옆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미치광이 묵노 이용우가 뒤에서 춘곡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춘곡이 뒤로 벌렁 자빠졌다. 연장자에게 큰 실례이므로 좌중이 이용우를 크게 나무랐는데 툭툭털고 일어난 춘곡이 『그만들 두어요. 그 사람 늘 그런걸!』하고 그냥 그림을 그리더라는 것이다.
춘곡은 무섭게 절개를 지키는 사람이지만 또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마텔」이 나한테 춘곡 이야기를 물을 때는 마침 춘곡이 총독부 주최 미전과 대항해 협전을 고수하고 있던 바로 이 무렵이었다. 춘곡이야기는 우선 이것으로 그친다. <조용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