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생채(윤난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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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랜만에 그이의 영양보충도 그러해서 삼계탕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넓지 않은 식품부의 부산한 찬거리를 구경하며 닭집으로 향했다. 어제까지도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늙은 오이가 여기저기 풍성히 쌓여 있다.
서너해전 첫아기를 임신했을 때, 지루하고 괴롭던 입덧이 거의 끝나고 뭔가 자꾸 새로운 것이 먹고 싶을 때였다. 아직은 이른봄인지라 애오이도 흔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나 계절감각도 잊은채 왜 그리 끈덕지게 늙은 오이생채가 먹고 싶던지.
어린 시절, 시골고향집에서는 언제나 한여름의 별미는 늙은 오이 생채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점심 무렵이면 할머니는 언제나 텃밭에서 싱싱한 늙은 오이를 한바가지 따오셨다.
할머니는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얇게 자르신 다음 엄지손가락에 말아 가늘고 길게 채 써시곤 하셨다. 어머니는 이 생채를 소금에 약간 절여 물기를 꼭 짜내 고추장과 갖은 양념으로 맛있게 무쳐서 언제고 풋고추 된장찌개와 함께 상위에 올려놓으셨다.
싱싱해 보이는 것으로 2개 골라 집으로 왔다. 저녁준비를 서두르는데 벨이 울린다.
아직 그이의 귀가시간은 아닌지라 누구일까, 궁금히 여기며 현관문을 열어 보니 검게 그은 친정어머니 모습이었다.
『어머, 엄마. 웬일이셔요? 이 더운날에 연락도 없이...』『네 생각이 나서 왔다. 이거 받아라』하고 건네주시는 짐 보따리를 받고 보니 무척 무거웠다. 첫 손녀의 입덧때 늙은 오이 생채를 무쳐 먹고 싶다던 딸의 생각에 혹 이번 입덧에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어 서둘러 오셨다는 어머님의 배려가 눈물겹도록 감사히 느껴진다.

<경기도 시흥군 관천면 원문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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