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만큼 뜨거운 〃예산 더 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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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예산실 (경제기획원4층)의 여름은 어느 곳보다도 덥다. 하필이면 여름철마다 벌어지는 예산전쟁의 열기 때문이다.
사무실마다 밤이 늦도록 고성이 오가고 때로는 서로 타이르고, 졸라대는 촌극을 연출해내기도 한다. 국민들로부터 거둔 세금으로 여하히 나라살림을 꾸려나가느냐를 따지는 진통의 현장이다. 어느 나라고 예산실의 기능은 예외 없이 막강하다. 정치건 행정이건 「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예산의 비중도 따라서 커진다. 예산을 어떻게, 어느 규모로 짜느냐는 국민경제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엘리트들 자부심 대단>
미국의 예산국장 스토크맨은 미국을 움직이는 10인 안에 든다. 예산국 자체가 대통령 직속기구로 예산뿐 아니라 법제·조직까지 한 손에 장악하고 있다. 예산의 편성방향에 따라 주가와 금리까지 움직인다.
일본의 경우 예산당국인 대장성의 주계국은 「관청중의 관청」임을 자타가 인정한다. 주계국직원들은 고시합격자중에서 가장 엘리트가 뽑힌다. 자부심과 권위도 대단하다. 콧대높은 정치인들도 주계국에 들어갈 땐 허리를 굽힌다는 말이 있다. 선거 때 표와 직결되는 선거구 사업들이 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각 관청에서도 한몫 놓아준다. 주계국장 출신이 대장성사무차관이 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그만큼 주계국 직원들에 대한 요구도 높다. 평가기준도 학과점수를 떠나 성품, 상식적인 판단능력, 심지어 집안까지 세밀히 따진다.

<장관 못잖은 영향력>
요컨대 국민의 세금거둔 돈을 맡아 관리하고 나라살림을 짜나가야 할 관리들은 집안까지도 홈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만은 못해도 우리나라의 예산실도 막중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총사령관인 예산실장은 직급으로야 1급이지만 어느 부처 장관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해예산을 짜면서 예산실장의 청와대 보고횟수가 보통 20∼30회를 넘는다는 사실만 봐도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예산은 으례 수입보다 지출요구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예산국의 책임과 권한은 막중하다. 어느 것을 얼마큼 잘라 내느냐는 각 부처의 기능과도 직결된다. 그 예산을 안주면 아무 일도 못한다. 각부처가 무슨 일을 하려면 일단 예산국을 납득시켜야한다.
예산실의 경제기획원에 속해 있는 것도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독특한 스타일이다. 미국처럼 대통령직속기구이거나 일본처럼 재무부에 속해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경우도 처음에는 재무부에 있던 것을 61년 경제기획원이 생기면서 떼어왔다. 개발도상국의 특성을 고려해 경제총괄부서에다 예산권을 맡겨놓은 것이다.
경제기획원장관이 부총리 직함을 갖게된 것도, 또 경제부처 뿐 아니라 일반부처업무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정부의 돈줄을 쥐고있기 때문이다.

<업무기획 안 새게 보안>
예산전쟁은 연초벽두부터 시작된다. 부처별로 벌이는 대통령업무보고가 그것이다. 저마다 그럴듯한 사업을 구상해서 여하히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내느냐가 최대 관심사다. 대통령재가만 얻어내면 이를 앞장세워 예산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부처가 업무계획 내용이 사전에 새나가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그래서다.
한해의 예산편성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3월말.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정도를 감안해서 대체적인 예산규모와 주요원칙들을 결정한다. 이 지침을 기준 삼아 각부처가 5월말에 예산요구서를 제출, 이때부터 진짜 예산전쟁이 벌어진다.
예산실측은 어떻게 해서라도 깎으려들고 각 부처들은 깎일 것까지 감안해서 값을 부른다. 내년예산의 경우 당초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경우 금년보다 1조원 가량이 늘어나게 되는데 각 부처는3조원을 더 요구해 왔다.

<정치적 차원서 결정>
이 2조원을 깎는 작업이 지금 한창인 것이다. 예산실은 깎으려하고 각 부처는 안 깎이려고 결사적이다. 이 실랑이는 복더위에도 불구하고 8월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동안 1백여명의 예산실 직원은 아예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밤11시가 퇴근시간이다.
8월말로 끝나는 전쟁결과는 대통령보고를 거쳐 9월20일께 최종적인 정부안으로 확정된다.
그 다음 차례는 세금 낸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심의다. 기업으로 말하면 사업자금을 댄 주주총회의 최종결정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동안은 시비를 별여도 정부관리들끼리 은밀하게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국회에 올라오면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국회의원들은 납세자의 편에 서서 세금을 깎기도 해야하지만 지역구사업을 생각하면 한푼이라도 더 늘리라고 목청을 높여야 한다. 갖가지 이해관계가 얽히게 마련이다.
결국 나라살림 (예산) 이란 단순한 경제적인 논리를 떠나 정치적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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