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그들이 몰려 온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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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로부터 45년 뒤인 2005년,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문학상 시상식이 줄을 이었다. 나는 수상자가 나와 인연이 있는 시상식, 문학상 자체가 나와 인연이 있는 시상식에는 참석하기로 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런 시상식에 참석할 때마다 수상자들의 성비(性比)를 따져 보는 버릇이 있다. 좀 유난스러운 버릇이다. 내가 참석해 본 시상식의 여성 수상자의 숫자는 여전히 1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시상식은 뒤풀이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뒤풀이 술집에 앉아 일삼아 여성의 수를 세어 보았다. 놀라지 마시라. 50%에 가까웠다. 절반에 가까워진 것이다. 젊은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내 딸 또래 여성도 있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50%에 가까운 여성들이 미래의 수상자들로 부상하고 있다는 징표 아닐는지. 무서운 힘으로, 놀라운 속도로 밀고 들어오는 여성의 힘이 아닐는지.

이런 자리까지 따라나선 여성 중에는 유난히 흡연자들이 많다. 한 30대 여성 시인이 내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배 소설가 하나가 그 시인을 꾸짖었다. 아버지뻘 되는 선배 앞에서 무슨 짓이냐고 제법 매섭게 꾸짖었다. 내가 남성 아니었다면, 그 시인이 여성 아니었다면 그렇게 꾸짖지 않았을 것이다. 두고 볼 수 없어서 내가 그 후배 소설가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겨우 뒤풀이 자리에서나마 성비가 제법 어울리게 되었는데 무슨 짓이냐고 싫은 소리를 했다. 그 후배는 내게 물었다. 여자들이 너무 나대는 거 아니에요?

천만에. 강건(剛健)함은 남성의 특징이고 유순(柔順)함은 여성의 특징이란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이다. 그럴 법하다. 전쟁터 누비고 사냥터 누비자면 강건하고 강경해야 했겠다. 집안일 건사하고 아이 낳아 키우자면 섬세하고 유순해야 했겠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지금도 힘으로 전쟁하고 힘으로 사냥하는가? 지금도 유순함만으로 여성은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남성은 크고 강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종족은 수백 년 전부터 백인들에게 저항, 노예로 끌려간 적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 사회는, 여성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견주어 남성은 유유자적하는 것으로도 또 한번 유명하다. 남성은 전쟁에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전쟁 치른 지 몇 년이나 되었느냐는 질문에 마사이족 남성은 머쓱해 하면서 대답을 못하더란다. 전쟁 운운은 남성이 개발한 논리라는 혐의가 이만하면 짙지 않은가?

내 서가를 채우고 있는 책의 저자들 이름을 유심히 훑어 본다. 아직 여성 저자의 책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80년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여성 저자들 이름이 간간이 눈에 띌 뿐이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여성 저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어서 길을 걷다 보면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인사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이 여성이다. 책 읽는 여성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마땅히 몰려와야 한다.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나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딸 있으시죠? 그렇다. 딸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눈 뜨지 못했을 것이다.

이윤기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