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경마 5년 만에 직업·가정 다 잃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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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20만원) 잃었어. 어제 잃은 거 만회하려고 배당이 높은 데 자꾸 손이 가서…."

19일 오전 경기도 부천시의 한 성인오락실 앞. 오락실에서 막 나온 신모(38)씨와 전모(36)씨는 맥 빠진 목소리로 '아침 실적'을 물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 대부분을 성인오락실에서 보내는 '오락실 폐인'이다. 매일 부천.인천.의정부 등지의 새로 생긴 성인오락실을 찾아간다. 새로 생긴 오락실을 찾는 이유는 호객을 위해 지급되는 2만~3만원 상당의 보너스 쿠폰을 얻기 위해서다.

신씨와 전씨는 5년 전 서울의 한 스크린경마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3개월여 전부터는 여인숙 룸메이트가 됐다. 기자는 18일부터 20일까지 숙식을 함께하며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부천역 근처 월 30만원짜리 여인숙에서 사는 이들의 하루는 오전 9시30분 시작된다. 눈을 뜨자마자 장롱 안에 수북이 쌓인 오락실 쿠폰을 챙긴다. 오전 10시쯤 집 근처의 PC경마장에 들어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워낙 자주 들러 '고정석'이 됐다.

"마필들 경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화면 속의 말 그림들은 질주했다. 숨죽인 1분30초. 곧 전씨는"제기랄…"하는 탄식을 터뜨렸다. 1만원에 해당하는 점수를 잃었다.

이들은 30여분 만에 게임을 마치고 다른 오락실을 향했다. 전씨는 인근 환전소에서 5% 정도의 수수료를 떼고 6만5000원을 현금으로 되찾았다. 5만원을 내고 보너스 쿠폰 3만원을 합쳐 게임을 시작했으니 1만5000원을 번 셈이다. 전씨와 신씨는 오락실에서 주는 보너스 쿠폰에 자신들의 돈을 합해 게임을 한 뒤 돈을 조금 잃으면 이를 다시 현금화하는 방식으로 오락실에서 조금씩 돈을 벌어 연명해 간다. 5년간의 경험에서 배운 기술로 오락과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신씨는 5년 전까지 중소기업에서 금형 작업을 했다. 그러다 스크린경마에 발을 들여놓은 후 매달 수십만원씩을 잃었다. 100만원 안팎의 월급이었음에도 '대박'을 생각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회사까지 그만둔 신씨는 4년간 함께 산 부인과 헤어졌다. 가족과의 왕래도 끊겼고, 같은 오락실에 '출퇴근'하는 20여 명 정도가 그에게 남은 친구의 전부다.

전씨는 군에서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제대한 뒤 각종 아르바이트로 삶을 꾸리다가 스크린경마에 빠져들었다. 군대에서 악착같이 모은 2700여만원은 성인오락실을 다니는 와중에 한푼도 남지 않았다. 하룻밤에 100만원까지 잃은 적도 있다고 했다. "직장을 다시 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왔다"는 그는 "두 아이와 아내를 팽개치고 성인오락실에 매달린 친구도 있는데 그나마 딸린 식구가 없는 나는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부천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하루는 소주 한잔으로 마무리됐다. 술자리에서도 PC경마 이야기가 이어졌다. "발산동 근처에 새로 생긴 경마장이 쿠폰을 잘 챙겨준다던데, 가봤어?"

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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