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공들인 가게 만신창이 … 물건 1억 넘게 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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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래 최악의 흑인 폭동이 발생한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시내는 간밤의 격렬했던 폭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자동차, 유리창 깨진 상점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한인들의 피해도 컸다. 메릴랜드 식품주류협회(회장 송기봉)는 27일(현지시간) 폭동으로 22곳의 한인 상점이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28일 오전 10시쯤 폭동의 진원지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루트 40 인근 웨스트 랜밸 스트리트를 찾았다. 랜밸 스트리트에 있는 박영민씨의 주류 판매점 문 앞은 깨진 유리가 가득했다. 기자가 차문을 열고 내리려는 순간 큰 가방을 멘 흑인 남성이 불쑥 가게에서 나왔다. 깜짝 놀라 다시 차 안에 몸을 숨겼다. 박씨는 전화 통화에서 “나도 폭도 때문에 가게에 못 갔다. 경찰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니 빨리 자리를 피하라”고 했다. 그는 “가게가 나에겐 아메리칸 드림이고 생활 터전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폭동의 중심지인 노스 애비뉴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가 만나는 부근에 있는 ‘원더랜드 주류 판매점’을 찾았다. 가장 격렬하게 폭동이 일어난 곳이다. 20년째 주류 판매점을 운영 중인 윤석원씨의 가게에 들어서자 텅 빈 진열대와 창고만 눈에 들어온다. 금액으로만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 넘게 털렸다. 윤씨는 “이곳에서만 20년, 볼티모어에서 34년 장사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한숨 지었다. 폭동이 시작된 몬다민 몰에서 조금 떨어진 ‘킴스 주류 판매점’ 역시 피해를 봤다. 이한엽씨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감시카메라에 비치는 매장 내부를 집에서 확인하다 깜짝 놀랐다. 시위대가 자물쇠를 절단하고 유리창을 뜯어낸 뒤 약탈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야간통행금지가 내려졌음에도 새벽 4시까지 시위대는 약탈을 자행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가족 단위로 들락거리며 물건을 가져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경찰 신고도 소용없었다. 이씨가 오전 4시30분 가게를 찾았지만 다 털린 뒤였다. 그는 “전쟁터보다 못한 상황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고 허탈해했다.

 이번 볼티모어의 흑인 시위가 격화된 배경에는 열악한 경제 상황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흑인 인구가 63%에 달하는 볼티모어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난 까닭은 높은 실업률, 열악한 주거 환경과 교육시설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분석했다. ‘실업→공공요금 체납→공공 서비스 약화→슬럼화→시(市) 재정 악화→일자리 창출 부진’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실정이다.

 볼티모어의 실업률(10%)은 전국 평균보다 4%포인트, 빈곤율(24%)은 10%포인트 높다. 특히 볼티모어 샌드타운은 인구 중 3분의 1이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 주민의 20%가 수도세를 못 내 수돗물 공급도 못 받는다.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폭동의 도화선이 된 흑인 청년 프레디 그레이가 살던 볼티모어 빈민가는 메릴랜드주에서 교도소 복역 인구 비율이 가장 높다. 실업자인 청년들은 갱단에 가입하고 있으며 이번 폭동에도 갱단이 개입됐다는 추정이 나온다. 빈부 격차도 심하다. 미국 중산층 수입이 5만1939달러인 반면 볼티모어 샌드타운 중산층 수입은 평균 2만4000달러다. 워싱턴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볼티모어는 1950년대만 해도 90만 명이 살았지만 대표 산업인 해운업 등이 쇠락해 인구가 62만 명까지 줄었다. 퍼거슨 사태에 이어 볼티모어까지 흑인 폭동이 일어난 것을 두고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 시대의 역설’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볼티모어=허태준 워싱턴 중앙일보 기자, 서울=서유진 기자 heo.taejun@koreadaily.com

사진 설명

사진 1 경찰 구금 중 숨진 흑인 청년의 장례식을 계기로 흑인 폭동이 발생한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킴스 주
류 판매점’ 내부에는 폭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진=워싱턴중앙일보]

사진 2 지역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폭동의 중심지 부근에 있는 ‘원더랜드 주류 판매점’을 청소하고 나온 쓰레기를 차에 싣고 있다. [사진=워싱턴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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