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피카소 귀화 거부 밝혀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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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프랑스가 피카소의 귀화 신청을 거부한 사실이 밝혀졌다.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 최근호가 공개한 '피카소에 대한 당시 프랑스 경찰의 보고서'를 통해서다. 서류는 50년 동안 소련 KGB 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오다 2000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피카소가 첫 전시회를 위해 프랑스 땅을 밟은 1901년부터 파리 경찰은 '파블로 루이 피카소'라는 스페인 청년을 예의주시했다. 그가 동포이자 무정부주의자인 피에르 마나슈의 집을 거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잠시 그의 동태를 놓쳤던 파리 경찰은 1905년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라플륌'지에 쓴 피카소의 두번째 전시회 비평을 계기로 추적을 계속한다." 최근 거지를 구타하는 외국 군인 그림을 그렸다""스페인으로부터 편지와 3~4종의 신문을 받고 있다" "매일 밤 외출한다"는 등 동향이 철저하게 보고됐다.

1918년 그가 결혼할 당시 보고서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변했다. "연간 임대료 1천8백프랑의 빌라에서 2년째 거주, 하루 수입 25프랑, 친(親)프랑스 성향, 평판 좋음…." 그 사이 입체파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1907년) 피카소는 몽파르나스.몽루즈 등을 거쳐 38년 파리에 정착, 불후의 명작 '게르니카'를 탄생시켰다.

스페인 내란에서 프랑코 장군이 승리하자 공화파 지지자인 피카소는 귀국이 불가능해졌다. 또 유럽에서의 전쟁 위험을 직감한 피카소는 40년 프랑스에 귀화 신청을 했다.

피카소는 이미 세계적인 화가였고 상당한 재산을 모은 상태였다. 당시 귀화 신청서에 첨부한 서류를 보면 임대료가 연간 2만7천5백프랑이며 39년에 낸 세금은 68만5천3백36프랑(인플레 감안 약 3억6천5백만원)이나 된다.

그러나 파리 경찰의 의견은 '거절'이었다. "피카소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로 향하는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그는 '사후 내 작품을 소련에 기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외국인은 귀화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국가 차원에서 '요주의 인물'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결론짓고 있다.

귀화 신청을 포기한 피카소는 73년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그래서 그는 영원히 스페인인으로 남았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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