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아낙·아이, 그림처럼 살던 곳 … 창신동 돌아온 박수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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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하루는 좀 일찍 들어오시더니 ‘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집이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뭐가 그렇게도 사랑스러우냐고 하였더니 ‘먼발치에서 우리집을 바라보면, 저 집안에 죽었다 살아 온 나의 사랑하는 처자식과 동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다’고 하셨다.”(아내 김복순씨가 박수근 20주기전에 쓴 글 ‘나의 남편 박수근과의 25년’)

 박수근(1914∼65)이 돌아온다. 6·25로 본가(강원도 금성)를 떠나 월남해 정착했던 서울 창신동 인근으로. 창신동 집 마루는 그대로 그의 화실이었다. 거기서 그린 그림은 가족의 양식이 됐고, 아이들의 학비가 됐다.

 그의 50주기를 맞아 30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국민화가 박수근’ 전이 열린다. ‘나무와 두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노인과 소녀’ ‘길가에서’ ‘빨래터’ ‘골목 안’ 등 좀처럼 모이기 힘든 그의 대표작 50여 점이 함께 전시된다. 박수근 50주기전 조직위원장인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우리의 관습에 따르면 고인을 추모하는 전시는 50주기를 계기로 더 이상 10년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세대에 열릴 마지막 박수근 회고전을 위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유화와 수채화 50여 점을 엄선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작 중 간판 작품은 ‘나무와 두 여인’(130×89㎝)이다. 앙상한 겨울 나무 밑에서 아이 업은 여인은 서성이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거리며 지나가는 그림이다. 1962년, 48세 박수근이 그렸다.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서울에서 그와 함께 미8군 PX에서 일하며 시대를 견뎠던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박수근의 나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와 내가 같은 일터에서 일한 것은 일 년 미만이었지만 그 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와 같이 걸었던 길가엔 겨울 풍경만 있었던 것처럼 회상된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내 눈엔 마냥 춥고 헐벗어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연 ‘우리의 화가 박수근’ 전에 보내온 글)

 멧돌질·절구질하는 아내, 과일 팔던 행상, 거리의 노인, 주식이 되어 준 감자, 모처럼 먹을 수 있었던 굴비, 책가방과 고무신…. 박수근의 화폭에는 그때 그 시절, 그분들의 모습이 정직하게 담겼다. 생활 속에서 관찰한 주변의 현실이다. 그의 아내는 “그이는 아침 10시경에 붓을 들면 저녁 4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5시쯤 시내에 나가서 전시회를 보고 친구들과 만나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다 들어오시곤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의 그림에는 화강암을 닮은 질박한 마티에르 속에 시간만 한정없이 남아돌던 그때가 비석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노인·아낙·아이 등 약자를 화폭에 담았던 화가, “밀레를 닮은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는 박수근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은 간 질환으로 고생했다. 백내장 수술이 잘못돼 62년부터는 한쪽 눈을 못 보게 됐다. 만년엔 남은 한 눈으로 그림을 그렸다. 65년 5월 6일 오전 1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생을 마쳤다. 그림에 겨울 나무만 그리던 그는 그렇게 봄에 갔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입장료 성인 8000원.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박수근=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27년 양구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2년 독학의 시골 미술학도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해 입선했다. 52년 월남해 서울 창신동에 자리잡고, 이듬해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 렸다. 65년 5월 간경화로 사망, 그해 10월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연 유작전이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사진 설명

사진 1 전시작은 평소 보기 힘든 대작 위주로 엄선했다. 사진은 나무와 두 여인(1962·130×89㎝).

사진 2 빨래터(1950년대·50.5×111.5㎝)가 그렇다. 이 그림은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면서 국내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빨래터(37×72㎝)’보다 1.5배쯤 크다.

사진 3 우물가(1953)는 그해 국전 특선에 꼽혔다.

사진 4 서울 창신동 살림집 마루는 그의 화실이었다. 왼쪽부터 부인 김복순씨, 둘째 딸 인애(11세에 병사), 박수근. 오른쪽은 집 주변의 정겨운 풍경을 그린 ‘골목 안(80.3×53㎝)’. [사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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