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전업주부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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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9살 난 딸아이가 식사를 하면서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글쎄, 음… 우리 딸이 예쁘게 커가는 걸 지켜볼 때가 행복하지."

궁색한 답변을 늘어놓으며 왠지 '전업 주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고 서글픔에 목이 메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긴 머리 찰랑거리던 아가씨도 아니고 출퇴근 만원 버스에 치열한 삶의 무게를 실어야 했던 직장인도 아닙니다. 딸아이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전업 주부'라는 타이틀이 이제는 저를 대표하는 이름표가 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성적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무엇보다 올바른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편하게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자기 성취 대신 햇볕 좋은 날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뒷산.놀이터.박물관.도서관.공연장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이 아이에겐 즐거운 소풍이었고 저에겐 엄마로서 최선이었지요.

홈쇼핑.컴퓨터보다 아이와 눈 맞추고 옹알이에 대꾸해주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행복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나란히 앉아 동화책을 읽는 시간이면 엄마는 사악한 마귀 할멈이 되고 예쁜 공주님도 됐습니다.

그러던 어린 꼬마가 어느새 초등학생이 됐네요. 제 할 일을 제법 알아서 잘하고 있는 딸아이는 이제 엄마에게 '시간'을 선물하고 있답니다. 덕분에 구인구직난을 살펴 보는 게 요즘 제 하루 일과가 됐습니다.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몇 시간은 훌쩍.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와 계발 중단된 능력 탓에 번번이 거절당하는 취업 장벽에 오늘도 절망합니다.

10년 전 내게 투자했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전업 주부라는 말에 이렇게 목이 메이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10년. 결코 허술하게 살지 않았는데 제 인생의 성적표가 왜 이리 초라하게 느껴지는지요. 요즘은 딸아이와 장래 희망이나 직업의 세계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답니다. 엄마의 막막한 고민을 벌써 알아버린 듯 느닷없이 주부로서의 행복을 물어오는 딸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또 다른 모습으로 엄마의 자리를 찾아 갈 거고, 그게 제 인생의 성적표라고요.

박근경(38.주부.서울 녹번동)

*** 12월 23일자 소재는 '성탄절'입니다.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과 직업.나이.주소.전화번호를 적어 12월 20일까지로 보내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매달 장원을 선정해 LG 싸이언 휴대전화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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