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방미 때 '바탄 죽음의 행진' 미군 포로 만찬 초대…과거사 물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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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신조 일본 총리 [사진 중앙포토DB]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포로로 붙잡힌 뒤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퇴역 미군을 29일 워싱턴 만찬에 초대했다.

아사히 신문은 26일부터 미국을 방문하는 아베 총리가 상·하원 합동 연설 직후에 열리는 만찬에 일본군 포로 출신인 레스터 테니(94) 아리조나 주립대 명예교수를 초대했다고 23일 보도했다.

일본 과거사와 관련, ‘진주만 공습’과 ‘바탄 죽음의 행진’을 뚜렷이 기억하는 미국인들에게 아베의 일본군 전쟁범죄 피해자 초대는 상징적이다. 이 때문에 아베 총리가 테니 명예교수와 화해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과거사 물타기를 시도하려는 속셈이란 분석이 나온다.

테니 명예교수는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가 2만 명 가까이 숨진 ‘바탄 죽음의 행진’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생존 포로들이 만든 단체의 대표를 지냈다. 또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출간했다. 포로생활 중 당한 강제 노역에 대해 배상하라고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2010년 9월엔 일본 정부의 전 미국인 포로 일본 초청 사업 미국 측 단장 자격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현 민주당 대표) 당시 외상으로부터 사과를 받았다.

‘바탄 죽음의 행진’은 1942년 4월 9일 시작됐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 7만 명을 폭염 속에 100km 넘게 강제 행진시켰다. 필리핀 루손섬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걷게 한 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13km를 행진하게 했다.

포로들은 땡볕 아래에서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9일간 행진했다. 전염병과 구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낙오되는 포로를 총검으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결국 5만4000명만이 포로 수용소에 최종 도착했다.

아사히신문은 테니 명예교수가 "아베 총리의 초청을 받아 매우 영광”이라며 만찬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일본 정부가 테니 명예교수를 만찬에 초대함으로써 옛 미군 포로와 유족들이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 등에 품고 있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jhleeh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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