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회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개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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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160개국에서 30만 명이 몰려들고 수천 개의 제품이 진열된 전시장에서라면 이런 질문은 자연스러울 것 같다. “올해 트렌드가 뭐죠?” 그런데 이탈리아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장에서는 이런 질문은 하나마나다. 브랜드를 막론하고 답이 같다.

최고경영자(CEO)는 두꺼운 브랜드 책을 펼치면서 설명한다. “이 의자는 1932년에 처음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인기를 끌고 있고, 이 조명은 1950년에 만들어졌는데 올해 블랙 칼러가 새로 추가됐고….”

올해 54회를 맞은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장(Salone del Mobile.Milano)의 현장이다.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프랑스 메종 앤 오브제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행사로 꼽히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다.

행사는 14~19일(현지시간) 밀라노 페어그라운드 로에 위치한 박람회장을 주축으로 열렸지만 밀라노 전역에 장이 선다. 밀라노 대학교, 일반 주택, 성당 등 건물 앞에 노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면 누구나 들어가서 디자인 관련 제품이나 전시를 볼 수 있다. 메인 스타디움인 박람회장(전시 면적 20만1700㎡)에는 2106개 업체가 참가했다.

◇협업의 힘=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는 ‘무제(無題)의 박람회’다. 반세기 넘게 열리고 있지만, 다른 박람회와 달리 따로 주제를 발표하지 않는다. 가구 전시를 주축으로 조명과 부엌가구 전시가 격년으로 열린다. 참가 업체의 90% 이상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업체다. 회사 부스별로 제품을 전시하는데 제품명과 디자이너 이름을 나란히 알리는 게 특징이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 디자인스튜디오의 차영희 수석 디자이너는 “국내 브랜드처럼 디자인실을 내부에 크게 두지 않고 외부 디자이너나 건축가와 협업해 제품을 디자인한다”며 “이탈리아 디자인의 힘은 외부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이를 구현하는 브랜드의 기술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2005년 박람회 때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부스를 방문하면서 유명해진 이탈리아 가구회사 몰테니 앤 씨(Molteni&ampamp;C)는 전시장 중앙에 다리 없는 책장을 뒀다.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디자인한 제품으로 10년 전에 출시된 제품이다. 맨 위 선반 하나만 벽면에 고정되어 있고, 그 아래 선반들을 와이어로 연결해 매달았다. 선반 하나당 120㎏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다.

까를로 몰테니 회장은 “장 누벨이 비행기도 타고다니는 세상에서 다리 없는 책장을 만들자고 제안해 1년간 연구해서 만든 제품”이라고 전했다. 그는 “신진 디자이너부터 유명 디자이너까지 스스로 몰테니를 찾아온다. 우리의 기술력만이 그들의 상상을 실현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시계는 느린 듯하지만, 옛 것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브랜드마다 새로운 소재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적극 투자하고 있다. 이탈리아 조명 회사 폰타나 아르테는 우주항공 분야 연구진과 협업해 알루미늄ㆍ나일론ㆍ유리섬유 등으로 조명을 만들고 있다. 루치아노 이안누찌 대표는 “전자제어장치를 만드는 나이스 그룹과 협업해 조명의 영역을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스마트폰 등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무공간의 혁신=올해 박람회에서는 ‘워크플레이스 3.0’이라는 테마로 업무공간 관련 특별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 내(1만1500㎡)에는 ‘더 워크’라는 2층 짜리 램프가 사방으로 나 있어 오르내리며 산책할 수 있게 했다. 이를 만든 이탈리아 건축가 미켈레 데 루치는 “업무공간은 마음을 위한 체육관이 돼야 한다.

미래의 사무실은 무한하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게 하는 공간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붐볐던 스웨덴 디자인 그룹 부스에서는 명상 음악이 계속 흘러 나왔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공용 의자에 앉으면 의자가 말을 건넸다. “안녕 나는 공간이야. 이제 넌 힘을 받을 수 있어.”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는 장인과 신진 디자이너가 단단하게 어우러진 디자인 클러스터의 장이었다.

밀라노=한은화 기자 onhwa@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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