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엔 갈등 증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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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유엔 예산안 처리를 놓고 미국과 유엔 간의 싸움이 거칠어지고 있다. 미국은 유엔이 빨리 내부 개혁을 하지 않으면 2006~2007년도 예산안 처리를 거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맞서 유엔은 테러용의자에 대한 고문 등 미국의 인권침해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

◆ '개혁 안 하면 예산 못 준다'=유엔 예산의 22%를 부담하는 미국이 또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꺼내들었다.

존 볼턴 미 유엔대사는 지난달 22일 "9월 유엔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유엔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개혁조치에 불을 지피기 위해 내년 석 달치의 예산안만 임시로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미 국무부도 거들고 나섰다. 니컬러스 번스 국무부 차관은 지난달 29일 "유엔 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미국은 유엔 예산안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석유-식량 교환 프로그램'스캔들로 상징되는 유엔의 부패.비리 척결을 내세우며 각종 개혁조치의 즉각적인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지출에 대한 면밀한 감사▶엄격한 윤리 감독▶사무총장 권한 및 의무 강화▶유엔 인권이사회 신설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유럽연합(EU)과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미국의 이런 움직임을 유엔 길들이기로 보고 미국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쨌든 예산안 처리가 늦춰지면서 유엔 측이 다급해졌다. 코피 아난 총장은 1일 한.중.일.베트남 등 아시아 4개국 순방을 취소하고 부시 행정부 설득에 나섰다. 그럼에도 미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이즈음 미국에 악재 하나가 터졌다. 중앙정보국(CIA)이 테러용의자를 신문하기 위해 유럽에 비밀감옥을 운영해 왔다는 보도였다. 유엔 고위 간부들은 미국의 인권침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루이스 아버 유엔 고등판무관은 7일 "미국이 고문 관련 국제협약을 어기면서 테러용의자를 제3국으로 넘긴 것은 명백한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했고 여기에 아난 총장도 가세했다.

◆ 일손 놓을 유엔=유엔의 최대 재정 부담국인 미국이 예산안 처리를 거부할 경우 유엔 업무는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유엔은 향후 2년간 예산액을 38억 달러로 잡고, 내년 첫 석 달에 4억5000만~5억 달러를 배정할 계획이었다. 유엔 정상회의 때 합의된 일들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이 주장하는 석 달치 예산은 1억7000만~1억8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 돈으로는 개발도상국 경제개발 지원, 인권보호 등 국제사법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유엔은 미국이 계속 고집을 부릴 경우 현재 별도 계정으로 운영되는 평화유지군 예산에서 임시로 돈을 끌어다 쓰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EU와 개도국은 물론 미국 언론들도 부시 행정부와 볼턴 대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는 "볼턴이 외교가 아닌 힘의 논리로 유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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