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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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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금융위기가 벌어지자 한국 기업들의 '과잉투자'가 도마에 올랐다. 국내 기업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투자를 많이 해 금융위기가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구조조정 작업이 심도있게 진행됐고 과잉투자를 방조한 금융권도 대폭적으로 개혁됐다.

그러나 구조조정 작업이 한참 지나간 현재의 시점에서 과잉투자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한보철강이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던 것은 중국 특수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한보철강의 '혜안(慧眼)'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지난 3, 4년 동안 중국은 전 세계의 철강을 빨아들였다. 국내의 모든 철강회사가 중국특수를 누렸다.

자동차업계도 공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기아자동차는 완전가동률을 유지하며 고속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에 인수된 대우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처음 GM이 대우차를 인수할 때는 앞으로 경영난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채권은행단이 10년짜리 장기 대규모 융자를 해줬다. 그러나 GM-대우는 현찰이 남아돌아 융자금을 미리 갚아야 하는 입장이 됐다.

'과잉투자'로 낙인찍혔던 기업들이 이렇게 호황을 누리고 있는 사실은 금융위기 당시 과잉투자 우려가 과잉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빅딜'논의가 있었지만 그동안 투자했던 시설을 줄이지는 않았다. 그 시설들이 지금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금융위기는 왜 벌어졌는가.

구조적 문제 때문이 아니다. 유동성 문제 때문이었다. 산업가들의 장기적인 안목은 거의 맞았다. 이들은 2, 3년 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5년 이상, 길게는 10년 뒤까지 바라보며 투자했다. 그러나 금융이 따라와 주지를 못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부가 산업 중심의 시각을 갖고 장기투자가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투자를 밀어준 것 때문에 금융기관에 손실이 나면 정부가 받쳐줬다. 기업들이 손실을 내더라도 금융기관들이 멀리 내다보고 밀어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금융 자율화와 개방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이러한 시스템이 무너졌다. 정부도 산업 중심의 시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금융기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기업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계속 더 지원하기보다는 자금을 회수하는 데 진력했다. 기업들도 이렇게 바뀐 금융환경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해외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면서 자금 회수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을 소홀히 했다. 97년 금융위기는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는가.

최근 하이닉스의 회생 사례가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하이닉스는 채권금융단 관리하에 들어간 뒤 금융기관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되살아났다.

하이닉스가 만약 독립기업이었다면 이 같은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가 경영상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금융기관들은 자금을 회수하기에 급급했다. 금융기관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하이닉스의 회생과 자신들의 수익 간에 단단한 고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분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감시'라는 측면에서 맞는 얘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경제 내에 장기투자가 계속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간에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금융과 산업이 분리돼서는 금융계의 단기위험관리 경향과 산업계의 장기투자 간에 상충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경제는 지금 중진국에 도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따라서 금융권에 많은 자금이 대기하고 있다. 이 자금이 장기투자에 활용될 수 있도록 산업과 금융의 고리를 만드는 작업이 다음 단계 성장을 위해 핵심적 과제인 것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