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저 내용 바꾸게 한 번역자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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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원저 289쪽의 본문 제16행 마지막 문장부터 293쪽의 제22행까지는 저자와 협의하에 삭제했다. 제7장의 '한국어판 보론'을 참조할 것."

최근 발간된 '세계인권사상사'(도서출판 길) 483쪽에 달린 역주(譯註.번역자가 붙인 주석)다. 일반 책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대목이다. 감히(?) 원저를 삭제했다고? 또 저자와 협의했다고? 그렇다면 '한국어판 보론'은 무슨 말?

사정은 이렇다. 번역자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저자 미셸린 이샤이(미국 덴버대) 교수가 이라크 전쟁의 조기 종전으로 이라크에 인권이 개선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지 않은가. 원저가 지난해 출간됐고, 저자가 원고를 2002년 마무리한 탓이다. 시차는 이해가 되지만 지금도 총성이 끊이지 않는 이라크 사정을 감안할 때 뭔가 보완할 필요를 느꼈다.

조 교수는 저자에게 e-메일을 띄웠다. 인권 문제를 다루되 9.11 이후 달라진 국제정세를 반영하는 별도의 글을 요청했다. 저자는 역자의 요구에 기꺼이 응했다. 역자가 지적한 부분을 삭제하는 데 동의하고, 원저에 없는 내용을 따로 정리해 제7장 '인권 세계관의 통합'을 완성했다. 그리고 지구화(세계화)라는 거센 흐름 속에서 소위 시저파(세계 인권개선을 위해 테러집단에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와 스파르타쿠스파(강대국 미국의 일방적 무력 행사를 비판)를 통합하는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 결과, '세계인권사상사' 표지에는 '한국어 개정판'이란 생소한 문구가 붙었다. 원저에 없는 내용이 한국어 번역본에 추가됐다는 것을 뜻이다.

이 밖에도 조 교수는 원저의 오류를 100여 곳 수정했다. 저자와 40여 차례 e-메일을 주고받으며 작게는 역사적 사건.용어 등을 바로잡고, 크게는 내용도 손질했다. 그는 "손님을 초대하더라도 주인이 조건을 정할 수 있듯이 외국서적을 우리 독자에게 소개할 때 요구되는 최소한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저자도 "역자의 헌신적 노고와 철두철미한 작업이 없었다면 한국어판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마워했다.

'세계인권사상사'는 서구권에서 나온 최초의 세계인권 통사로 평가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권의 발전사를 '약자'의 입장에서 정리했다. 인권은 '하늘로부터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학술서임에도 지난해 미국 논픽션 10대 도서로 선정될 만큼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때마침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일. 조 교수는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에 걸맞은 핵심적이고 수준 높은 학술서가 한 권 추가됐다"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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