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이주 동독인 몸값 지불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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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동독 사람들이 말하면 누구나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듣는다. 「가족 재결합」이란 명목으로 서독 이주 허가를 신청했다는 한가지 의미로만 이런 문귀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독이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쌓아 동독 시민의 탈출을 막고 양독 간의 접촉과 교류를 제한한 이래 서독으로 탈출하는 유일한 합법적 통로가 된 이런 형식의 이주 신청이 요즘 들어 급격히 늘어나고 허가 건수도 증가하고 있다.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서독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연평균 6천∼1만명이었던 것이 금년 들어선 2월말 현재 2천명을 넘어·이런 추세라면 연말까지 2만∼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밖에도 동베를린의 미국 대사관이나 서독 상주 대표부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독 대사관에 집단적으로 들어가 버티며 서독 이주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서독 정부는 동독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고 양독 관계가 긴장하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기본 입장이다.
지난주 「빌리·슈토프」 동독 수상의 조카딸 가족이 체코의 서독 대사관에 들어가 서독행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을 때도 서독은 동독측과 막후 협상을 벌인 후 「슈토프」 수상의 조카딸을 일단 동독으로 돌려 보냈다.
서독 정부는 지금까지 동독의 정치범들에 한해 「몸값」을 지불해 가며 석방시켜 왔다.
보도 기관들은 평균 몸값이 8만∼10만 마르크(2천 9백만∼3천 6백만원)정도로 1년에 2백∼3백명 정도 석방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최근 서독 이주에 대한 동독 정부의 태도가 전에 없이 관대해진 데는 서독의 「돈줄」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서독 정부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지만 종래 정치범 석방에만 지불해 오던 몸값을 서독 이주 희망자들에게도 2만∼3만 마르크씩 지불하기로 약속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90억 달러의 외채를 서방에 지고 금년 중 갚아야 할 원리금이 30억 달러에 이르는 동독은 지난해도 서독으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1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받았었다.
양독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데 동독을 서독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묶어 두고 분단 문제와 이산가족 문제를 조용히 처리해 가는 세련된 정치 기술이 이런데서 잘 드러난다.【본=김동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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