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모두 '공범' … 정부는 '방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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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국회는 매번 헌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법정 기한을 못 지키는 것일까? 이는 의원 개개인의 성의 부족이라기보다 정치관행 자체가 늑장처리를 '제도화'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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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부터 한 달 허송= 올해도 정부는 9월 28일 2006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헌법에 따라 정부는 회계연도 개시 90일(10월 2일) 전까지 예산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정부로선 할 일을 제때 한 모양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국회가 곧바로 예산 심의에 착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국정감사와 일정이 겹친다. 올해 국감은 9월 22일부터 10월 11일까지였다. 국감이 끝나면 10월 말까지는 각 상임위가 열린다. 이때 각종 법안과 추경안을 심의해야 한다. 중간에 대정부질문도 잡혀 있다. 올해엔 10.26 재선거까지 치러 여야 모두 당력을 그쪽에 집중했다. 결국 국회가 정부 제출 예산안을 들춰보려면 11월은 돼야 한다. 이 같은 의사일정을 잡은 것은 여야 모두의 책임이다.

11월 초부터 상임위 차원의 예산안 예비심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일은 더 꼬인다. 모든 상임위가 예산을 멋대로 늘려놓기 때문이다. 해당 정부 부처는 이를 방조한다. 부처이기주의다. 올해도 16개 상임위의 예산심사가 마무리된 뒤 예산안은 정부 원안 보다 1조3000억원이나 늘어났다. 국회 관계자는 "어차피 예결위에서 깎일 테니 인심이나 써두자는 식으로 상임위에서 예산을 늘리는 게 여야 모두의 관행"이라고 지적했다.

◆ 지키지 못할 일정에 그나마 늑장=올해 예결위가 가동된 것은 11월 14일이다. 당초 일정은 종합정책 질의(14~15일)→부별 심사(17~22일)→예산안조정소위 구성(21일)→소위 가동(24~29일)→예결위 통과(30일)→본회의 의결(12월2일)로 잡았다. 부별 심사까지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하지만 예산안조정소위 구성 방식을 놓고 여야가 맞서 소위가 구성된 게 25일이다. 4일 지각이다. 그나마 소위는 28일 본격 가동했다. 통상적으로 소위 가동부터 본회의 의결까지 보름 이상 걸린다. 소위를 1주일도 안 돼 끝내겠다는 일정 자체가 무리고 그나마 늑장을 부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 바탕엔 "법정시한은 안 지켜도 된다"는 여야의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올해의 경우 한나라당이 8조원 가까운 예산 삭감안을 들고 나와 소위의 운영이 더뎌졌다. 2일에야 감액부문 1차 검토가 끝났다. 5일부터 증액부문 검토에 들어갈 예정이다. 증액부문 검토엔 4~5일이 걸린다. 지역구의 각종 민원사업이 끼어들어 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 당 지도부도 예산 나눠 먹기에 가세한다. 그런 뒤 다시 감액.증액을 위한 2차 검토를 한다. 밀고 당기기가 치열해지면 그만큼 시간이 흘러간다. 결국 예결위 전체회의에 넘기려면 이달 중순은 될 것으로 보인다. 임시국회가 불가피하다.

재경위의 부동산 관련 법안.감세안 처리도 큰 걸림돌이다. 이들 법안의 처리 향배에 따라 수조원의 세입이 왔다 갔다 한다. 예산안을 확정하려면 이들 법안이 결론나야 한다.

◆ 여야.정부 모두의 책임=열린우리당 전병헌 대변인은 "예산 심의기간이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야당이 예산안을 하나의 정치적 협상카드로 생각하는 자세가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은 "상임위 이기주의 때문에 부풀려 넘겨진 예산을 꼼꼼히 챙기려면 예산소위 활동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도 제출 기한을 지켰다고 자위하기보다 미리 여야 및 해당 상임위원들과 사전에 협의해 처리기한이 지켜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기태(전 예결위 수석전문위원) 복지위 수석전문위원은 "정부 각 부처가 5월 말까지 기획예산처에 예산을 요구할 때 그 시점부터 국회가 정보를 공유해 실질적인 심사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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