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1000원짜리 포스터 50만 원 된 사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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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37면

김진하·이섭 작, ‘전환의 사(史)’ 목판, 45×56㎝, 1987. [사진 나무화랑]

미술평론가 겸 전시기획자인 김진하(55·나무화랑 대표)씨는 화가 출신이다. 홍익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한동안 작가의 길을 걸었으나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와 붓을 꺾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오랜만에 재회한 자신의 옛 작품 한 점 때문에 회상에 젖었다. 문제의 그림은 1987년 작 아트 포스터 ‘전환의 사(史)’다. 아는 이가 전화로 문의한 내용은 이 포스터가 ‘서울 옥션’ 경매에 나와 응찰하려는데 진짜가 맞느냐는 얘기였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살펴보니 자신이 제작한 오리지널이었다. 지인은 250만 원에 낙찰 받아 서재에 걸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왔다.

‘전환의 사’는 한국 근현대사에 등장했던 인물 30명을 새긴 목판화다. 구한말 의병으로부터 노동운동가 전태일까지, 역사의 격랑을 타고 넘은 인사들 얼굴이 목판 특유의 칼칼함으로 살아있다. 해방 공간의 극우·극좌 세력도 보이고, 주먹·돈의 폭력으로 국가를 장악한 군인 세력과 그에 맨손으로 저항했던 민주세력 면면도 선명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 내걸어도 손색없을 정신의 낭랑함이 오달지다. 이런 공감이 통했는지 요즘 들어 간간이 이 아트 포스터를 찾는 이들이 있어 그를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28년 전 서울 서교동 한강미술관(1984~ 89) 큐레이터로 일하던 김진하씨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비싼 아트 포스터가 남발되는 한국 미술시장에 역행해 대중화된 판화로 미술의 소통 기능을 넓혀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독일에서 그림공부를 하다 귀국한 이섭(55)씨와 의기투합해 목판화 ‘전환의 사’를 제작했다. 당시 서울 봉천동 낙성대 근처 작업실에서 목판을 새길 때는 제대로 된 제작 도구가 없어 숟가락으로 일일이 판을 밀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일단 7장 오리지널을 만든 두 사람은 누구나 이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한지 느낌이 나는 초배지에 1000장을 인쇄해 1000원씩에 팔았다. 한강미술관에 들른 관람객이 그냥 집어간 일도 많아 제작비도 못 건졌다고 했다.

김씨를 놀라게 한 일이 또 벌어진 것도 경매 때문이었다. ‘전환의 사’ 인쇄본이 최근 ‘옥션 단’에 나와 50만 원에 낙찰됐다는 것이다. 30년 가까이 됐지만 단돈 1000원짜리가 500배 불어서 팔렸으니 본격 회화 작품 못지않은 소장 가치를 뽐낸 셈이 됐다. 이 저렴한 포스터가 긴 시간 사람들과 나눈 소통의 기쁨이야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 이해되고 사랑받고 싶어 목판 포스터의 형식을 과감히 받아들인 87년의 젊음이 그립다.

정재숙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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