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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본다] 16. 서양이 본 개화기 조선-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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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회에 걸쳐 우리 밖에서 본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먼저 서양이 본 조선의 모습, 다음엔 동양이 본 조선입니다. 서구 문명을 보편적 잣대로 놓고 그 외의 문명을 야만으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팽배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서양인들조차 근원적으로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당시 서양의 대다수 학자.저널리스트들은 조선이라는 '퇴보적인 국가'가 '진보적인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허동현 교수는 당시 조선에 대한 서양의 이미지가 "조선은 없다"라는 식으로 굳어지게 되는 배경에는 조선을 식민화하기 위한 일본의 조직적 선전 활동이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지적합니다.[편집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유교적인 인의염치(仁義廉恥)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호혜성(互惠性)의 원칙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획일적인 서구 문명과 국민 국가의 유무(有無)가 한 나라를 평가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잔혹한 국제무대에서는, 가는 정이 있는 데도 오는 정은 별로 두텁지 않은 예가 허다합니다.

안타깝게도 개화기 서양인과 한국인들의 상호 인식이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습니다. 개화기 고종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조정 대신들은, 여러 열강 중에서 특히 미국이 공평하고 욕심이 적은 나라라고 생각해 미국 선교사들에게 여러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정은 두터웠지만, 정작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개화기에 한국과 종교.외교적 관련을 맺은 모든 서양인을 침략의 첨병이나 제국주의자라고 매도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그들 중엔 개인적으로 한국에 대해 대단한 애정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았지요. 혹시 양화진의 외인묘지에 묻힌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1863~1949)의 묘비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고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의 주역 중 한 사람이기도 한 헐버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1949년 한국에 들어온 헐버트는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생전의 숙원대로 한국 땅에 묻혔던 것입니다. 헐버트는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의 비틀어진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국사(History of Korea'(1905)라는 방대한 저서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몰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퇴보하는 왕국이나 죽어가는 문명을 위해 통곡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철학이다. (중략) 한국에서 지금 낡은 것들이 소리나게 죽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술이 옛날의 술병에 부어지고 있다."

또 다른 저서인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1906)에서는, 한국 전래 무속을 한국인들에게 씌워진 저주라고 서술하고, 불교 사원의 잔인한 지옥도(地獄圖)들 때문에 한국 형벌제도가 잔혹해졌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청소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헐버트가 죽어가는 전통문화에 대해 통곡할 리는 만무합니다. 헐버트와 같은 문명의 전도사들은 한국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이 진보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구 기독교 문명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럼에도 분명 헐버트는 식민화를 막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고종의 애원을 무시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민족을 배신하는 데 앞장섰다"며 소리 높여 비판한 친한파였습니다. 문제는 그처럼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 양심적 문명의 전도사들조차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지요.

당시 서양의 대다수 학자.저널리스트들은 한국이라는 '퇴보적인 국가(George Kennan, Korea, a Degenerate State: 'Outlook', Oct. 7, 1905)'가 '진보적인 일본(William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9)'에 국권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심지어 미국 사학의 거두인 데닛(1883~1949)은 한국이라는 자그마한 보트가 침몰하지 않으려면 일본에 의해 반드시 견인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망언에 가까운 그의 발언은 사실 당시 미국 학계와 외교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필리핀이나 중미 등지에서 행한 식민지 약탈 정책을 문명의 전파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했던 당대 서양의 주류 인사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선 폐정(弊政)의 개혁을 들먹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진 설명 전문>
1902년 영국과 일본이 맺은 동맹을 풍자한 그림. 남성과 여성으로 형상화된 영국과 일본, 그리고 이들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당시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의 관점에서 당시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더 상대적 진보성을 인정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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