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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이젠 불치병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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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80년대 유행 초기에 에이즈는 곧 죽음이었다. 그러나 에이즈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이 개발된 90년대 중반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20가지가 넘는 치료제가 있으며, 하루에 두 알만 먹으면 되는 약까지 나왔다. 치료제를 투여하면 바이러스가 죽어 없어지고, 면역력이 회복되어 더 이상 발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에이즈환자들은 2~3개월에 한 번씩 진료를 받으며 건강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마찬가지로 에이즈도 이제 불치병이 아니라 치료할 수 있는 만성병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치료 성과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현재의 치료법으로는 세포 속 깊숙이 숨어있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므로 약을 중단하면 바이러스가 재발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유수한 과학자들이 유전자나 줄기세포를 이용한 신개념의 치료법을 개발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에이즈가 완치될 날이 올 것이다.

진단 기술도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현재의 에이즈 검사는 매우 정확해 감염된 사람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 한 가지 예외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아직 3~6주 (드물게는 6개월)가 지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에이즈에 걸릴 만한 일이 있은 뒤 3~6주가 지나 검사했는데 음성으로 판정받은 사람은 에이즈 감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에이즈의 전파 경로도 낱낱이 밝혀졌다. 환자의 땀.침.소변으로는 감염될 위험성이 없다. 그러므로 환자와 악수하거나,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거나, 같은 그릇의 음식을 먹거나, 말할 때 침방울이 튀더라도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다. 환자의 혈액이나 성기의 분비물이 내 몸속으로 침투하는 일만 없으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 100명 가운데 99명이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고 있다. 그리고 동성애보다 이성 간 성관계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이미 10년 전부터 에이즈는 보통 사람들도 걸릴 수 있는 성병이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에이즈에 대한 사정은 이렇게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에이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환자 옆에만 가도 에이즈에 걸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에이즈라면 특이한 성행위를 연상하며, 감염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는 편견도 여전하다. 감염 사실이 드러나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도 등을 돌리고, 가족에게마저 외면당하는 것이 감염인이 겪는 현실이다.

이러한 차별과 편견이 감염인을 음지로 숨어들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검사를 받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감염된 줄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에이즈를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에이즈에 대한 차별과 편견, 이것이 바로 에이즈 확산의 주범이다.

지금 에이즈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의 감염자가 올해 4000만 명을 넘었다고 유엔이 발표했다. 올해만 490만 명이 새로 감염됐고, 올 한 해 에이즈 사망자도 310만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85년 1명으로 시작된 에이즈가 2000년 1000명을 기록하더니, 올해 벌써 3650명을 훌쩍 넘어섰다. 우리가 진정으로 에이즈를 올바로 이해하고 차별과 편견을 없애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2010년에는 에이즈 1만 명 시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오명돈 서울대 의대 교수·감염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