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40년 만에 받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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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용하씨의 유작 악보를 보면서 기뻐하는 이대여·김정일·윤은희씨(왼쪽부터). 최정동 기자

가곡 '보리밭'의 작곡자 윤용하(1922~65)의 딸 은희(55)씨는 25일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부친이 타계하기 넉 달 전 작곡한 유작의 악보였다.

시인 이준범(1922~2003)씨의 시집 '황우(黃牛)'(1961)에 실린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56년작)에 곡을 붙인 가곡이다. 부친의 유작 악보를 이준범씨의 장남 대여(53)씨에게 건네 받은 것이다. 4분의 4박자 E♭장조의 36소절짜리 가곡이다.

비가 오는데/ 우비 없어 좋다/ 흠뻑 젖어 심화 (深化)하는 게 좋다// 저만치 비맞는 가로등은/ 시점(視點)을 어디다 두고/ 동공(瞳孔)이 파문 (波紋) 지노// 비가 자꾸 오는데/ 밤이 깊어가는 게 좋다// 하늘도/ 고향도 없어 좋다// 옛 일이 못 잊혀 운다는 건/ 우는 게 아니라 비에 젖는 것// 가로수(街路樹)가 없는 포도(鋪道)/ 밤비에 젖어// 이웃 없이/ 그저/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

1965년 3월 윤용하씨는 동갑내기 술친구로 평소 알고 지내던 이준범 시인과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윤씨는 풍문여고에 갓 입학한 딸 은희씨가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닐 형편이라는 얘기를 술김에 한숨으로 뱉어냈다. 이에 이씨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윤씨의 손에 쥐어줬다.

두 달 후 윤씨가 술 대접을 하겠다고 이씨를 찾아왔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까. 윤씨는 악보를 이씨에게 건넸다. "이걸로 부채는 갚은 걸로 해주게".

이씨는 윤씨가 타계한 뒤 그 악보 생각이 나서 온 집 안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76년 다락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문제의 악보를 찾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동양방송(TBC) FM의 가곡 프로그램 PD였던 김정일(60.현 TBN 한국교통방송 방송사업본부장)씨에게 악보를 넘겼다. 김씨는 최영섭의 편곡, 테너 김화용의 연주로 이 작품을 녹음해 76년 11월 7일 오전 7시부터 30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다락방에서 잠자던 유작 가곡이 전파를 탄 것이다. 하지만 작곡자의 유족들은 이 작품의 존재조차 모른 채 30년을 지냈다.

올해 윤용하 추모 40주기 기념음악회에도 '가는 길…'은 연주되지 않았다. 40주기 기념음악회 소식을 접한 김씨가 집에 있던 테이프 더미에서 특집 방송 테이프를 발견하고 시인과 작곡자의 유족들에게 연락해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아버님이 유작 노랫말로 고른 시가 '가는 길…'이란게 마치 죽음을 예견하신 것 같아요. 50주기 추모 음악회 때는 꼭 연주곡에 넣고 싶어요."(윤은희씨)

"등록금 빌려 주시고 받은 작품이니 저작권은 제게 있네요(웃음). 누구라도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면 기꺼이 악보를 빌려 드리겠습니다."(이대여씨)

"40주기 되는 해에 유작을 다시 찾게 돼 기뻐요. 필요하신 분들께 실황 테이프를 나눠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김정일씨)

이장직 음악전문기자<lully@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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