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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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월의 상큼하고도 매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겨울. 50대 중반에 들어선 중년신사가 서울 영동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름은 박현태. 한때 그는 강남 땅 환락가라면 어디고 안 누빈 곳이 없는 인물이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의 술버릇이 개차반이리하여 농반 조롱 반으로 그의 이름을 따「박견태」라고 불렀다. 또 술집 아가씨들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팁을 잘 뿌리고 멋이 있다고 하여 「박괴테」라고 아양을 떨기도 했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한잔 마셨다하면 강 건너서 마셔야 된다」는 강남 땅은 l994년 현시점에서 그 어느 골목을 기웃거려 봐도 옛날의 휘황한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치 오늘의 강남은 l984년의 뉴욕 할렘가처럼 빈민가로 퇴락 해져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만 세월 참 많이 변했군.』 그는 입 속으로 중얼대며 코트 주머니에서 향수병 만한 술법을 꺼내 들고 코끝으로 음미하더니만 홀짝 들이 켠다. 요즈음 한창 애주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코스모스」란 술이다.
이 술은 코끝으로 음미하는데서 환각제처럼 반쯤 취하게 만들고, 그 다음 액체가 입을 『카아!』하게 만드는 알딸딸한 맛을 주며 식도로 흘러내리게 된 것이다. 근래 이런 술 종류로는 「2001년」 「뒤폴로」 등이 있다. 우주 개발 추세에 맞춘 일종의 에키스 술이다.
에키스 술로 인해 음주 형태도 완전히 달라졌다. 왕년처럼 밤새도록 아가씨들을 끼고 술이건 안주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두들기는 풍로가 싹 사라졌다.
이를테면 「코가 비뚫어지게 먹는다」는 것은 정말 꿈에서나 꿀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었다 .신흥 환락가인 반월 쪽에는 이런 부류의 술집이 있는 모양이지만 고급 「비밀 요정」 같은 곳이었다.
달라진 것은 물론 이것뿐이 아니다. 술집도 칸막이 집이나 룸살롱이니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거의 스탠드바 형태로 변했다. 이곳에는 술집 아가씨들이 몇 명씩 있으나 「돈만 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왕년의 여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직장인이었다.
손님 중에 더러는 옛날 술 먹던 버릇이 남아서 노 브러지어나 노 팬티의 아가씨라 하여 『미스 김, 이리로 좀 와봐!』 했다가는 『손님! 누구한테 반말이예요』하며 핀잔 맞기 일쑤요, 『미스 리! 그 앞가슴 말이요. 「마릴린·먼로」있지, 그만큼 매력 있는데』하며 희롱했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오직 할 수 있는게 있다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처럼 몸매나 안주 삼아 감상하며 마시는게 고작이었다.
이에 따라 술꾼을 남편으로 둔 아내들은 걱정이 자연히 없어졌다. 술집 여자 때문에 속썩는 일이나 가계부를 적자로 내는 「긋고 먹는 술」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월급이라는 것도 어디 남편이 만질 틈이 있어야지. 월급날만 되면 온라인으로 가정에 직접 들어가니 술꾼들은 더러 한탄하지만, 해봤자 어떡하겠는가 세태가 그렇게 변해버린걸.
『쳇, 변하지 않은 건 계절밖에 없군.』
엄동을 배회하던 박현태씨는 차가운 겨울 바람에 목을 옴츠리며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강우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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