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20여년 공들인 덕택에 할리우드 돈 끌어들였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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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0년쯤 전에 할리우드 돈으로 한국영화를 찍겠다고 한다면 봉이 김선달로 치부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요새 충무로다. 60억원대 순제작비를 들인 무협영화 '무영검'(18일 개봉.감독 김영준)은 미국 타임워너 계열의 영화사 뉴라인시네마에서 제작비의 30%를 투자했다. 덕분에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서 대규모 개봉되지 않을까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는 태원엔터테인먼트의 정태원(41) 대표를 만났다. 본래 외화 수입부터 시작한 그이니만큼 뉴라인.미라맥스 등 미국 제작사와 돈독한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터. 하지만 투자까지 이끌어낸 비결은 남다를 듯했다.

"20년 가까운 인연이죠. 한창 어렸던 저를 귀엽게도 보고, 대기업이 아닌 개인사업자라 동정도 한 모양이에요. 뉴라인은 '닌자 거북이' 같은 영화를 만들던 작은 회사였는데 '마스크''덤 앤 더머''세븐'을 만들면서 점차 커졌어요. 그때마다 모여서 축하하고, 특별한 일 없이도 비행기로 날아가 자주 만났어요. 가족 같은 관계가 된 거죠. 비서들의 선물도 꼭 챙겼어요. 미라맥스에 있다가 최근 드림웍스로 옮긴 사람을 만났는데 그 비서가 제가 7년 전 사준 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더군요."

여기에 수입을 철저히 정산하며 신뢰를 쌓은 것이 현재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뉴라인이 만든 '반지의 제왕'시리즈는 이후 막대한 흥행수입에 비하면 헐값인 450만 달러에 구매할 수 있었는데, 이후 2000만 달러에 달하는 추가 로열티도 꼬박꼬박 지급했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첫 카드로 그가 뽑아든 '무영검'은 덕분에 뉴라인과 거래하는 다른 나라 주요 배급사들에도 선판매가 순조로웠다. 현재까지 400만 달러 정도의 미니멈 개런티 계약을 맺었고, 흥행에 따른 추가 수입과 별도의 방송.DVD 판권 수입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현지 공연기획사에서 잠시 일한 경험을 살려 국내에 마이클 잭슨 등 대규모 공연을 기획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영화팬이었던 데다 "직접 만드는 것이 좋아서" 이후 지금의 회사를 차려 외화수입과 한국영화 제작을 병행해 왔다.

재미있는 것은 '반지의 제왕'시리즈나'저수지의 개들''킬빌'처럼 그가 수입한 외화와 직접 제작한 한국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이 크게 대조된다는 점이다. 연달아 500만 관객을 넘어서는 성공을 거둔 '가문의 영광'과 '가문의 위기'가 대표적이다.

"상업영화 만드는 한국감독들은 이상한 죄의식에 빠져 있어요. 팝콘무비, 즉 기획영화를 만들면서 영화제에 나갈 영화처럼 평론가들에게 별 다섯 개를 받고 싶어하니까 죽도 밥도 안 되는 기형적인 영화가 나오죠. '가문의 위기'는 우리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졌는데 별이 두 개였어요. 그렇다고 그걸 보러간 관객이 다 별 두 개냐 하면, 그건 아니죠. 상업영화는 상업적인 가치를 인정해 줬으면 좋겠어요. 상업영화 망한 나라치고 예술영화 잘 되는 나라도 없거든요."

이처럼 그의 지향은 흔히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고 믿는 작가주의 신봉자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시나리오는 물론 촬영.편집 과정에서도 요구와 주장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사도 다양해야죠. 감독을 우대하는 회사도 있어야겠고. 저는 프로듀서 성향이 강한 제작자입니다. 가끔 '긴급구조대'가 들어가 철저한 일반관객 대상 모니터를 해서 그 결과를 반영하도록 합니다.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 상업영화를 만들기로 약속해 놓고 감독의 의도를 장면마다 자막으로 설명해 줘야 하는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되죠."

그는 국내에서 내년 한 해 8편의 영화를 준비하는 한편, '무영검'에 이은 새 다국적 프로젝트 '삼국지'도 준비 중이다.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 다국적 영화 무영검
발해시대 배경
검객들의 대결

'무영검'은 서기 926년을 무대로 발해의 마지막 왕자(이서진)를 지키는 여자무사(윤소이)와 발해의 후손이면서도 거란에 합류한 검객들(신현준.이기용)의 대결을 그리는 영화다. 무술감독 등 중국 스태프와 함께 영화 전체를 6개월간 중국에서 촬영했다.

정태원 대표는 "'와호장룡'이나 '영웅'으로 세계적으로 무협물이 안착할 시장이 생겨났다"고 무협장르를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비천무'(2000년)를 처음 중국에서 찍으면서 고생했던 김영준 감독과 그 노하우를 썩히지 말자고 했다"고도 덧붙인다.

발해의 경우 고증자료가 별로 없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은 점도 감안했단다. 굳이 국적을 따지자면 중국풍의 인상이 짙은데 "중국과 뭘 다르게 할지 많이 고민했다"면서 "'와호장룡'의 대나무 장면처럼, 우리만의 것으로 생각한 게 수중(水中)액션"이라고 답한다. 물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이 장면은 놀랍게도 배우들이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만들어졌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강풍기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날리고, 옷자락에 낚싯줄을 매 움직이면서 고속촬영으로 찍은 영상을 국내 기술진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해 완성했다.

대신 대사는 자막을 싫어하는 외국 관객을 감안, 의도적으로 최소화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줄거리에서는 제목과 달리 무영검에 대한 얘기가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고쳐 쓰면서 그렇게 됐다"면서 "제목을 바꿀까 고민도 했는데, 감독의 얘기대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검'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살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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