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남한의 인권, 북한의 인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73년 8월 DJ가 도쿄에서 납치됐을 때 수장(水葬)을 면한 건 미국 정부의 압력 덕분이다. 5공 정권이 사형을 선고했을 때도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는 조건으로 그를 구해냈다.

YS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해 23일간의 단식을 단행했을 때 국내 신문은 한쪽 귀퉁이에 '야권인사의 식사 문제'라고밖에 쓰지 못했지만 외국 언론에 의해 위압적인 통치행위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79년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YS의 뉴욕 타임스 회견은 의원직 박탈과 총재 제명, 급기야 부마항쟁, 10.26사태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이루기까지 이렇게 해외 양심세력에 많은 빚을 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국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양상은 실망스럽다.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수구 꼴통'으로 몰리는 판이다. 해외 언론의 작은 기사 한 줄에도 힘을 얻던 과거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북한 동포의 인권과 민주화는 애써 외면한다. 유엔 결의안 채택에도 번번이 기권하고 있다. 동포의 고통을 정쟁의 수단으로 만든 데는 좌우 모두 책임이 있다.

북한 당국은 남측에 신발 6000만 켤레를 달라고 요구했다. 비누 2만t, 의류 3만t도 주문했다. 폐타이어.짚신, 심지어 맨발로 얼음 땅을 밟으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 어린이의 참담한 모습은 우리 마음을 얼음송곳처럼 찌른다. "비료를 줘서 사람들이 탈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게 인권 개선"이라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말도 그런 연민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경제논리, 내정간섭이라는 주장이야말로 박정희 시절 흔히 듣던 말이 아닌가. 쿠데타정권을 용인한다는 이유로 반미를 외치던 민주화 세력이 내세우는 논리로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기아 문제가 급하다고 발목을 자르고, 돌로 쳐죽이고, 성적 학대를 하는 등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인권침해를 묵인할 수는 없다.

대화 상대를 달래야 한다는 주장도 우리의 좀 더 나은 안전을 위해 동포들의 희생을 못 본 체 하자는 것 같아 부끄럽다. 더군다나 강제 납북자들의 송환은 국민을 보호할 남쪽 정부의 헌법상 의무다. 일본인 납치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사과까지 하면서 남한의 납북자 문제는 존재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정부가 미온적이고, 대다수 정치인은 정략에 따라 옥신각신하는 상황에서 무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군사독재정권의 반인권 정책을 외국에서 외면하고 한국 내부 문제로만 치부했다면 노무현 정권 주변의 민주화 운동가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북한 인권 문제는 보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략의 도구가 돼서도 안 된다. 민주화운동을 해 온 세력이 먼저 정략의 고리를 끊고 북한 인권 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기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기대일까.

김진국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