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한·일 양국, 이제 미래를 말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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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선 일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일본은 전후 50년이 지난 뒤에야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인정.반성.사죄하는 소위 '무라야마 총리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는 그 뒤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정착돼 기회 있을 때마다 이곳저곳에 인용되고 거론돼 왔다. 따라서 일본은 당연히 무라야마 담화에 충실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일본 정부와 정치권은 이 담화의 정신에서 일탈하고 후퇴하는 언행을 너무 자주 자행해 한국과 중국을 자극해 왔다. 유감천만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고이즈미 이전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총리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항의가 있은 뒤로는 신사참배를 자제했다. 무라야마 담화가 있은 뒤 총리에 취임하면서 담화에 충실하겠다고 약속한 고이즈미 총리가 한.일 관계와 한.중 관계의 악화를 무릅쓰고 신사 참배를 계속 강행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이즈미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의 다수도 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고이즈미 총리의 눈에는 한.중.일 우호협력 관계를 통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과 번영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고이즈미의 일본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자세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일본과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넓혀야 한다. 첫째는 과거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준 일본을 증오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거를 거울 삼아 일본이 우리를 감히 넘보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로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는 일본을 더불어 같이 살기 어려운 이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도움도 줄 수 있는 이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일본에서 배울 것도 많고 얻을 것도 많다. 보다 넉넉한 마음과 긍정적인 눈으로 일본을 보고 또 상대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자세는 일본에도 요청되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종전 후 20년 되는 해에 불행했던 시대를 몸소 경험한 세대의 손으로 한.일 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양국의 지도자가 같이 노력했지만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결단이 더욱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가기 위해 과거에만 매달릴 수는 없고 오늘과 내일을 위해 결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과거사와 관련된 문제로 양국 간에 분규가 수없이 많았으나 두 나라는 국익을 위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갈등을 극복하면서 한.일 관계를 괄목할 수준으로 발전시켜왔다. 지금 한.일 관계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촘촘한 그물과 같이 얽혀 있다. 어느 한 분야가 긴장된다고 거기에만 매달려 한.일 관계 전체를 긴장시킬 처지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무수히 강조돼 왔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제 불행했던 과거는 마음속 깊이 묻고 현실 문제가 과거에 발목 잡히는 사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신사를 참배하는 고이즈미와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온다.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넉넉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들을 맞아 한.일 관계와 아시아의 미래를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김태지 전 주일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