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동맹이 변화하고 있는데 …

중앙일보

입력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에게 '대화하기 편한 상대'였다.

그래서 盧대통령도 걱정과 우려를 떨칠 수 있었다. 미국이 초행(初行)인 데다 미국 듣기에 거북한 이러저런 발언 탓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행차였다.

"볼일이 있어 갔다"지만 만남이 부담스러웠다. 부시 대통령의 참모들이라고 긴장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직설(直說)에 능한 盧대통령에 대해 익히 듣고 있던 터라 혹시라도 "그럼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나올까 가슴 졸였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 땅을 떠난 날부터 달라진 盧대통령의 언행에 주목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사전에 전달된 미 정부 측 입장을 한국이 대체로 수용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런 마당에 처음 만난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대화가 편안했던 배경이다.

그래도 엄청 긴장했던 盧대통령은 회담이 끝난 뒤 '생맥주' 한잔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게 정상회담이다. 합의문은 참모들이 만들고 정상들은 대개 큰 줄기의 덕담을 주고 받는 자리다. 그래서 정상회담에 실패란 없다. 1993년 말 김영삼-클린턴의 만남이나 3년 전 김대중-부시의 회동처럼 해프닝이 벌어지면 오히려 그게 화젯거리로 남는다.

워싱턴 회담은 그래서 성공적이었다. 돌출사태가 없어서다. 부닥칠 여지가 있는 예민한 부분은 뭉뚱그렸다. 뉴욕 타임스가 '모호한 합의'라고 빈정거릴 정도로 공동발표문은 '섞어찌개'가 됐다. 아무튼 미국은 盧대통령의 달라진 언동을 평가한다.

그렇다고 한국의 대북 자세가 크게 변할 것으로 기대하진 않는다. 한국이 대북 강경책에 따를 결과를 쉽게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다만 전혀 달라진 바 없는 미국식 북핵 접근법에 한국이 반발하지 않았다는 데 안도한다. 이번 회담에 대한 우리의 평가 못지않게 미국 역시 한.미 정상의 첫 대면을 높게 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적 해결에도 다양한 제재수단이 담겨 있고 북측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전쟁 아닌 전쟁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과연 한국이 감내할 수 있을까에 대해 미국은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다.

사태의 발전에 따라 언젠가는 동맹인 미국과 부딪치게 돼 있다고 본다. 그래서 盧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이는 동맹 간에 불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미국이란 '동맹'과 북한이란 '동족'이 적대(敵對)하며 공존하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핵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게 주한미군 재배치다. 예전엔 북한의 군사위협이 두드러지면 으레 전진배치된 미군의 역할이 강조되곤 했다. 이젠 더 이상 아니다.

워싱턴 합의문의 그럴듯한 표현 덕에 별일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아 현실로 닥칠 문제다.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도 북핵과 주한미군 재배치가 반드시 연계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북핵사태가 꼬일수록 재배치가 빨라질 가능성마저 있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주한미군의 후방 이동이 대북 군사조치를 용이하게 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북에 대한 압박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략은 미국조차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에서 확인했듯이 첨단무기의 혁신이 이처럼 생각할 수 없었던 전술에 눈을 돌리게 했다.

게다가 한국이란 동맹의 불가피한 피해를 담보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혹시 작용했다면 이는 분명 동맹의 성격변화를 의미한다. 너무 나간 얘기 같지만 자의반 타의반 다가올 한국의 군사억지력 강화 작업이 어차피 미국이란 동맹을 과거와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하는 상황을 강요하고 있다.(워싱턴에서)
길정우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