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은행잎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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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0월의 마지막 날을 택해 그이와 결혼한 지 10년.
「올 가을은 세상만사 제쳐놓고 그이를 졸라 단풍이 붉게 타는 산계곡을 찾으리라」 「설악산은 못 가더라도 도봉산 중턱에라도 올라야지」하는 황홀한 가을나들이 계획을 세웠지만 도봉산 입구도 구경 못 한 채 겨울문턱에 접어들었다. 핏빛단풍이 붉게타는 계곡은 TV화면에서나 구경했을 뿐.
사업을 하는 그이는 해외출장이 서너 달 간격으로 이어지고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때문에 때로는 남편을 손님(?)으로 맞으며 10년을 살았다.
신혼 초에는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고 출근하면 비상수단을 동원, 실력행사(?)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시들해졌다. 나이 탓일까, 아니면 감정이 무뎌진 것일까.
올 결혼기념일도 남편은 예상했던 대로 말 한마디 없이 출근했다.
야속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아침 가정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며 하루일과를 또 시작했다·그이와 즐겨듣던 곡들이 하나둘 이어졌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전화 한통없이 무심한 그를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아들녀석이 학교에서「딩동댕」벨을 누르며 뛰어들어왔다. 『엄마 이거요, 엄마 주려고 운동장에서 은행잎 주워왔어요』하며 신주머니에서 서너 줌의 노란 은행잎을 꺼내 내 치마 끝에 뿌려놓는 것이다. 순간 녀석의 마음씀씀이에 코끝이 아려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기나 한 듯 아들이 가져다 준 노란 은행잎 선물은 남편에게 느꼈던 섭섭한 감정을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았다.
두 팔로 녀석을 꼭 끌어안고 보드라운 두 볼을 꼭 물어주었다. 가슴이 뿌듯해왔다. 녀석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떤 선물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은행잎을 한 잎 두 잎 책갈피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오늘저녁 그이가 돌아오면 이 얘기를 들려주며 웃어줘야지』
내 마음은 벌써 활짝 개고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5가4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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