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고홍명(중국의 사상가)의 농담을 음미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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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독일 여행에서 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름다운 경치와 내 입에 딱 맞는 요리 맛이었다. 숲과 마을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카메라 들이댈 때마다 엽서가 나오겠다는 나의 의견에는 아내도 동의했다. 프랑스와 접경하는 도시 쾰른(콜로뉴)에서 먹은 그 지방 특산요리의 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내가 독일의 풍경과 음식 맛을 칭송하자, 1970년대에 독일에서 고단한 유학생활을 한 친구가 나를 나무랐다.

"자네, 정말 잘 못 보고 잘 못 먹고 온 것 같군. 독일은 볼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음악이나 철학이 발달한 것으로 유럽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나라야. 자네, 광부 생활하다 온 사람들 앞에서, 독일의 경치나 먹거리 운운했다가는 욕을 먹을 테니 조심하라고."

친구의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70년대에 그 친구가 유학하던 독일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에 대한 나의 인상은 완강하다. 특수한 몇몇 사례를 경험하고 이를 보편화하는 것은 나도 경계하는 짓거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견해는 '정평'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어야 하는가? 나는 중국이나 미국.독일.프랑스.영국에 대한 의견을 내어놓으면 안 되는가? 그러나 우리나라와 가까이 몸 맞대고 교섭하고 있는 이런 나라에 대한 인상기를 내어놓고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끝내 속수무책이어야 할 것인가?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뒤숭숭한 인상을 두고 쩔쩔매고 있던 중에 중국인 사상가 고홍명(1854~1928)의 일견 명쾌해 보이는 글을 혼자 낄낄거리며 다시 읽었다. 양학(洋學)에 몰두하던 철학자 임어당(1895~1973)을 일거에 '뻑 가게' 함으로써 국학(國學)으로 돌려 세운 사람이 바로 고홍명이다. 고홍명은 일찍이 영국에 유학,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에서도 공부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또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을 놀려먹은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중국은 물론 이 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꽤 정통했을 법한 그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고홍명의 저서 '중국 문화의 정신'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진실한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 한다.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는가? 미국인들은 폭이 넓고 단순하지만 깊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영국인들은 깊이가 있고 단순하지만 폭이 넓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독일인들은 일반적으로 깊고 폭이 넓지만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진실한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 까닭은, 프랑스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견주어 탁월한 수준의 사고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홍명은, 탁월한 수준의 사고 기능이란 정세(精細)함을 뜻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문화를 공부하면 미국인들은 깊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영국 사람들은 폭넓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독일인들은 단순함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인들, 영국인들, 독일인들이 중국 문화를 공부하면, 그들 모두에게 모자라는 정세함 같은 사고의 기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화.도식화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긴 미로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 고홍명의 농담 같은 비교문화론은 뒤늦게 찾아낸 해도(海圖) 같다. 언제 어디에서 써먹으려고 외울 필요까지는 없어도 한번 음미해 볼 가치는 있는 것 같다. 옷깃 여미고 나에게 묻는다. 너는 정세하냐?

이윤기 소설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