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대표 "미국이 안개 더 짙게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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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6자회담을 하루 앞둔 8일 중국 베이징 장안구락부에서 남북 양자회담을 마친 남측 수석대표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왼쪽)와 북측 수석대표 김계관 북 외무성 부상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현재 등대는 우리로부터 너무 멀리 있고, 바다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어 어떤 때는 등대가 보이지 않는다."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회담 개막을 하루 앞둔 8일 "미국의 일부 행동은 바다의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든다"며 이같이 말했다. 5차 6자회담 참석차 베이징(北京)으로 떠나며 평양 순안공항에서 한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전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으로 불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절제된' 표현이다.

대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폭군' 발언에 "추호도 용서치 않겠다"고 했지만 맹비난 수준은 아니었다. 대변인은 이날 "부시가 입에 담지 못할 악담으로 우리 최고수뇌부를 악랄하게 중상모독했다"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국 당국자가 주권 존중과 평화 공존을 지향한 6자회담 공동성명의 정신을 완전히 짓밟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지적했다.

우리 측 회담 관계자는 "어차피 사흘간 열리는 제한적 회담이니 서로 자극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했다. 징검다리 회담을 굳이 경색시킬 이유가 없다는 풀이다.

'미지근한' 분위기는 개막을 앞두고 이어진 양자접촉에서도 다시 확인됐다. 정부 대표단은 이날 오후 북한 및 러시아와 양자협의를 갖고 회담 운영 방안을 논의했다. 우리 대표단은 북측에 경수로 문제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태도 변화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수로 제공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논의키로 한 만큼 이번 회담에서 쟁점화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미국에 대해선 인권.미사일과 같은 북한과의 양자 문제를 부각시키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민순 우리 측 수석대표는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수석대표가 전날 제기한 '전문가 그룹 구성' 문제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라며 부정적 입장이었다. 최소한 이번 회담에서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입장을 비교하는 정도만 되면 그것이 성과"라고 회담의 기대치를 거듭 낮췄다.

결국 이번 회담은 회담 운영 방안 논의→각국 입장 개진→마무리에 하루씩 걸리는 사흘간의 '논의 없는' 회담이 될 전망이다. 회담 개막 전 회담장 주변에선 "다음 회담 날짜만 잡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마저 있었다.

베이징=최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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