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33) 야구와의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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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프로야구 출범을 전후한 뒷얘기는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 내 개인적인 야구사를 좀 얘기하려고 한다.

나는 1950년 6월24일, 그러니까 6.25 전쟁 바로 전날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던 야구대회에 참가한 몇 안되는 선수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도 야구와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나와 야구의 인연은 참 끈질겼던 것 같다.

내가 속해 있었던 서울상대 야구부는 당시 전국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참가해 6월 24일 성균관대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6.25 당일 오전까지도 연세대와의 준결승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성균관대는 신현철.김종환.이팔관 등 쟁쟁한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상대도 50학년도 신입생 멤버 만큼은 화려했다. 장태영.박정표(이상 경남중).이호헌(마산중).김의석(광주서중).김재복(인천중).김홍일. 문명채(대구상) 등 전국 각지의 우수한 선수들이 입학해 있었다. 우리는 대회를 앞두고 일주일 전부터 홍릉에서 합숙을 하며 팀워크를 다져 강호 성균관대를 이길 수 있었다.

6월 25일 새벽, 합숙 중이던 우리 야구부는 멀리서 들려오는 "쿵!" "쿵!"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무슨 소린가 싶어 동료들과 함께 급히 라디오를 틀어봤더니 북한이 남침을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해 일단 학교측의 통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학교측에서 대회가 중지됐다는 연락을 해왔고, 오후에는 각자 해산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려왔다. 나의 집은 돈암동이었는데 홍릉에서 이부자리를 꾸려(당시 합숙할 때는 각자가 자신의 이부자리를 갖고 가야 했다)집으로 급히 돌아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국가대표까지 지낸 매부의 영향이었다. 나의 매부 유복용은 선린상고-경성고상(훗날의 서울상대)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포지션은 2루수와 중견수였는데, 발이 빠르고 타격도 좋아 해방 후에는 서울시대표와 국가대표를 지냈다. 나는 해방 전인 43년부터 돈암동 집 마당에서 매부와 캐치볼을 하며 야구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매부의 경기를 보면서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됐다.

45년 해방이 된 이후 나는 야구를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내가 재학 중이던 경동중학(5년제)에 야구부를 만들었다. 당시 경동중학은 학교 재정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야구부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었다. 전통이 깊은 경기중학이나 경남중학이 동문 선배들의 지원으로 야구부를 활발하게 운영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경기중학 선수들은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오윤환 감독에게서 야구를 배웠고 야구 장비와 도구도 충분했다. 경남중학도 부산 야구의 대부인 고광적 감독 밑에서 체계적으로 야구를 배웠다. 경동중학에서 야구를 시작한 나는 이들의 넉넉한 형편이 몹시 부러웠다. 당시 나와 동료들은 학교에서 유니폼과 볼, 배트 만을 지원받았다. 글러브와 스파이크는 각자가 구입했고, 볼도 부족해서 훈련이 끝나면 실밥이 터진 공을 각자 집으로 가져가 꿰매서 다시 썼다.

배트도 깨어지면 못을 박고 테이프로 감아서 다시 썼다. 야구부는 만들었지만 지도할 감독이 없어 우리끼리 훈련을 하곤 했다.

경동중학을 졸업하고 50년 서울상대에 입학한 나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6.25가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군에 입대했다. 50년 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나는 중위 시절이던 52년 육군 정훈감 김천경 장군으로부터 육군야구단에 가서 야구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야구와의 연을 이어가게 됐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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