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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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자의 「참을 인」 은 생김새 그대로 마음속에 칼을 품고 있다. 물리적인 힘을 정신력으로 억제한다는 뜻인가.
역시 「참을 인」 자는 이와 촌의 합자.
원래는 죄인의 수염(이)을 짧게 깎는 형벌에서 유래한 한자다. 요즘의 죄인삭발과 같다. 「인내」 의 동양적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죄인을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힘을 축적해 둔채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덕목을 집의 당호로도 써 붙인다. 백인당.
서양이라고 사람의 마음이 다를 수 없다. 「인내」 를 뜻하는 영어 「페이션스」 (Patience)는 바로 고통이라는 뜻이다. 참기 어려운 일을 참자니 심통이 따를수 밖에 없다.
「참는다」 는 뜻의 또 다른 영어「인듀어」 (endure) 는 원래 『단련한다』는 뜻이었다. 가만히 눈감고 앉아있는 소극적인 「인내」 가 아니라 팔걷고 나서서 힘을 기르는 적극적인 「인내」 다.
성경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단련을, 단련은 소망을 이룬다는 것을 알라』 그런 적극적인 인내는 오늘의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다. 되로 받은 공격을 말로 갚는 식이다.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 과 같은 탈리오식 보복보다 더 가혹하다.
여기엔 전제가 있다. 첫째 힘을 쌓아두어야 하며, 둘째 그것이 최후의 선택일 수 밖에 없을 경우다. 「인내없는 보복」 은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 들인다. 작은 보복이 큰 보복이 되고, 그것은 바로 전쟁이다.
사람에게 인내라는 이성이 없으면 세상은 벌써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플루타크 영웅전』 에 나오는 어느 장군의 독백이 생각난다. 『인내는 포력보다 더 강하다. 단번에 꺾지 못할 것도 꾸준한 노력이면 정복할 수 있다. 인내는 최강의 정복자다』
그러나 세상에서 인내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인내와 고통은 나무와 뿌리의 관계와 같다.
불교에 「타파스」 (tapas) 라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열」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뒤에「고행」의 뜻이 되었다.
타파스는 수행자가 고행 끝에 얻는 전능의 힘으로, 고행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힘도 커진다. 바로 인내의 미덕도 그런 것이 아닐까.
세계의 역사도 따지고 보면 인내의 역사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그 시대의 고통을 잘 견디어낼 때 희망이 있었고 발전이 있었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것도 바로 인내의 결과다.
우리는 세계 어느 민족 못지 않게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그것은 역사책의 한 페이지만 열어보아도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시련의 역사는 적극적인 인내를 통해 우리 민족을 강인 (강인)하게 만들었다. 최근 랭군의 참사를 겪으며 전대통령은 『우리는 이제 최후의 인내를 남겨놓고 있다』 고 했다. 랭군참사의 연출자인 북한에 대한 저주다.
마지막 이기는 자가 누구인지를 북괴는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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