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3) 제80화 한일회담(32)-이대통령의 호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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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법적지위위원회와 함께 열렸던 선박위원회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중간에 얽혔던 일화 한토막을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두 의원회의 토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인 11월 중순께 본국에서 내앞으로 전보 한통이 날아들었다.
경무대의 고재봉비서관이 보낸 것으로『이번 주말을 이용해 급히 다녀가라』는 내용이었다.
교섭을 한창 하고 있는 대표에게 거두절미하고『빨리 다녀가라』는 것으로 보아 고비서관의 뜻은 물론 아니고 짐작에 대통령께서 고비서관을 시켜 전보를 치도록 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이유로 부르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별로 좋은 일은 아닌성 싶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된 데는 딱부러지게 짚이는건 아니지만 한가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럴듯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대표로 인선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로. 대강의 사연은 이렇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당초 대표단 인선때 대통령 주변에서 나를 두고 탐탁치 않은 얘기를 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회담전부터 대일 강화조약문제로 우리정부가 위해야할 입장을 내 나름대로 건의도 하고 재일한인문제 때문에 동경에 와서 SCAP측과 사전교섭도 벌이곤 했지만, 당시의 내 입장이라는 것이 정부관리도 아닌 터여서 내 딴에는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고 매사에 신경을 쓰느라고 했다.
그러나 무슨 오해가 있었던지 일부 인사가 나의 대표단 임명에 좋지 않은 얘기를 했다는 소리를 동경에 와서야 듣게 됐던 것이다.
처음부터 대표를 자청 한적도 없고, 막말로 무슨 운동을 한 기억도 없는데 등하불명이라고 뒤늦게야 이런 얘기를 전해듣고는 무척 불쾌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필시 오해이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경무대의 갑작스런 호출전문을 앞에 놓고 짐작이 가는거라곤 그 일밖에 없었지만, 경솔한 판단을 하기도 뭣해 홍진기대표 등 몇 사람에게만『본국에 급히 다녀올 일이 생겼으니 뒷일을 부탁한다』고 한뒤 다음날 비행기로 귀국을 서둘렀다.
토요일 저녁때 수영비행장에 도착하니 고비서관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짐작대로 고비서관은 나를 대통령관저로 사용하던 지사관사로 안내해 갔다.
고비서관과 나는 차속에서 이렇다할 얘기를 주고받지도 않고 곧장 관저로 직행했다.
고비서관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서『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방문을 나가기 전에 은근한 말로『각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든지 소신껏만 얘기하십시오』라고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방안에 들어온 이대통령은 내가 미처 인사를 차릴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유대표, 회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말해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예비회담의 경과와 지금까지 진행된 재일동포 법적지위위원회에서 오간 내용과 그동안 느낀 문제점들을 힘들여 얘기하다보니 족히 시간여나 흘렀을까. 시종 말 한마디 없이 귀를 기울이던 대통령은 처음 방에 들어올 때와는 딴판으로『내 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가서 쉬시오.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라고 부드럽게 얘기해 왔다. 그리고는『회의가 한창인데 왔으니 비행기가 있는대로 돌아가서 지금처럼 열심히 해주시오』라고 덧붙였다.
나는 방에서 나와 고비서관으로부터 비로소 저간의 경위에 대해 몇마디 더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은 나에 관한 일종의 모략 같은 얘기를 듣고 언짢아 하다가 당신이 직접 불러 얘기를 한번 들어보려고 하신 것이었다.
고비서관은『각하께서 유대표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뒤 오해가 모두 풀리신 것 같다』면서『만일 오해가 풀리시지 않으셨다면「다시 가서 열심히 일해주시오」라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해설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까짓 대표를 그만두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그동안의 허무맹랑한 곡해와 중상이 없어지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비서관이『각하께서 유대표가 귀임하기 전에 한번 더 부르실 일이 있을 것 같다』고 한마디 더 귀띔해 주었으나 나는 그저 그런가보다고 생각하며 관저를 물러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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