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3) 제80화 한일회담(22) 일본으로의 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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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일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인 양유찬주미대사가 피난임시수도인 부산에 도착한 것은 대표단이 동경으로 떠나기 3일 전이었다.
나는 수석대표에게 최소한 회담에서 토의될 여러 문제의 내용을 설명할 기회라도 있었으면 하고 초조해했다. 떠나기 전날 대통령 관저로 오라는 기별을 받아 내심 그곳에서 전략회의가 있겠거니 하는 기대를 갖고 임시관저로 갔다.
그러나 내 기대는 한낱 헛된 기대였을 뿐이다. 대통령 관저에서 양수석대표와 대표들간의 상견례가 이뤄진후 곧장 이승만대통령의 훈시를 듣고는 대표들간에 회의 한번 없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의 반일훈시는 대강 이러했다.
『우리가 한일회담을 하고싶어서 하는줄 아나. 미국친구들이 자꾸 권하고, 또 세계여론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지. 아뭏든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는 이땅에 또다시 일장기를 꽂지 못하게 할거야.』
그러면서 이대통령은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이는 행동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면서 이미 말한대로 허름한 차림새의 한 대표에게 50달러를 내주며 몸단장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것이 그때로서는 차원 높은 정치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리하여 회담에 관한 정부의 훈령 한마디 없이 대표단은 일본으로 떠났다. 단지 수석대표인 양대사의 양중에 이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개회식 석상에서 낭독할 연설문 원고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수석대표의 회담개회사를 대통령이 손수 작성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통해 흔치않은 기사임에 틀림없겠다. 그것도 전시중의 임시수도에서 처리하고 해결해야할 산적한 문제를 두고 손수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려 가며 수석대표가 읽어갈 연설문을 기초하는 노대통령의 흉중에는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
그것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의 강렬한 반일감정이 낳은 특이한 정신세계의 한 단면이 표출된 것이리라. 항일독립이라는 목표에 청장년기와 노년기의 대부분을 바쳐야했던 노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으로서는 이제 그 압제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최초의 대좌를 하는 마당에 과거의 원한과 미래의 화해에 대한 우리측 공식입장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비록 수석대표가 반일주의자고 자신이 직접 선택한 측근이였다고 하나 덜 미더웠는지도 모른다.
대표단은 51년10월19일, 그러니까 제1차 한일회담이 열리기로 된 바로 하루전에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청명한 가을 아침이었다.
많은 전송객이 나오고 군악대가 아침 햇빛에 철모를 번쩍이고 있었다.
간단한 환송식이 베풀어졌다.
우리 대표단은 화동으로부터 화환까지 받았으며 군악대는 애국가를 장엄하게 연주했다. 그때나 이때나 무슨 국제회의에 대표단이 간다고 공항 환송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는데, 정부가 피난수도에서 환송행사까지 한것을 보면 한일회담의 특수성이 더욱 실감된다고 하겠다.
35년간 나라를 빼앗은 바로 그 상대들과 독립이후 처음 갖는 회담이 아닌가. 대표들 모두의 가슴에는 군악대가 연주하는 애국가가 새삼 감격의 파장을 낳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는 우리 국적의 전세기였다. 날개에 태극기를 선명하게 그린 KNA(대한항공의 전신)의 쌍발여객기였다.
KNA가 설립된후 처음으로 날리는 비행기요, 또 태극 표지를 단 비행기가 일본하늘을 날으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대통령이 48년가을 「맥아더」장군의 초청으로 동경을 방문했을 때나, 49년 자유중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맥아더」장군이 내준 비행기를 타고 갔다. 이박사는 자신의 여행에는 남의 나라 장군이 내준 비행기를 타고 갈만큼 국고 축내기를 어려워했으나 우리 대표단에는 전세기를 타고가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그의 반일의 또다른 정신세계를 엿볼수 있는 예라고 하겠다. 대극표지의 전세기 위에서 동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며 나는 제법 마음이 흐뭇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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