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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역행하는 한국식 한자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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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필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이 중국인들과 대화하면서 비슷한 일을 겪을 것이다. 기분 좋은 일일 수 있다. 중국 본토인들보다 한자를 더 잘 안다는 말을 듣는데 괜히 어깨가 으쓱거린다.

그러나 정작 중국어로 된 문헌을 읽거나 여행을 다니면서 간판을 쳐다볼 때에는 한국식 한자교육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쉬운 단어인데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에 중국어 열풍이 불면서 많은 사람이 중국어를 배우지만 그전에 배웠던 한국식 한자와 별도로 중국식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겪는다.

물론 외국인들과 비교할 때 한국 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면이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성장했고 우리가 쓰는 많은 단어들이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영국에 유학 갔을 때 유럽 학생들은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은데 금세 영어를 잘하는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 유학 오는 서양 학생들이 한국 학생들을 보고 마찬가지 좌절감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은 술을 마시면서 많이 노는 것 같은데 자신들보다 중국어를 훨씬 잘한다고 불평한다.

그렇지만 한국식 한자교육이 안고 있는 중복 투자는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중국의 현대문(現代文)이 필요하지 고문(古文)이 필요하지 않다. 현대문을 먼저 배운 뒤 고문이 필요한 사람들만 그때 가서 고문을 배우면 된다.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고문을 먼저 배운 뒤 현대문을 배우도록 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됐다.

일부에서는 한자가 이미 국어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식 한자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종대왕께서 만들어주신 훌륭한 국어가 있다. 한자어가 많이 들어와 있지만 이를 국어로 다 표시할 수 있다. 영어 알파벳과 마찬가지로 한자는 외국어를 표현하는 방식일 뿐인데 종주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방식을 우리가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식 한자교육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정부와 학교, 선생님들이 현재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중국식 한자를 가르치려면 교과서도 바꿔야 하고 한문 선생님들이 대대적으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학생들 평가체계도 바꿔야 한다. 비용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용은 학생들이 앞으로 '쓸데없는' 한자를 배우면서 두고두고 치르는 비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부와 선생님들이 교육서비스 수요자인 학생들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당연히, 그리고 시급히 해결해줘야만 하는 사안이다.

한국 사회가 국제화되고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학생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배워야 하는 필요성은 더 커지고 있는데 여기에 옛날식 한자까지 배워야 한다고 더 큰 짐을 지울 필요가 없다. 과거 한자 교육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부와 선생님들이 자신들의 편안함을 위해 시대적 과제를 방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론도 과거 틀을 깨고 중국식 한자 사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필자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소프트웨어에서는 한국식 한자밖에 찾아지지 않는다. 중국식 한자도 병행해 찾을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한자를 처음 배우게 되는 학생들이 한국식 한자가 아니라 현대식 중국 한자로 된 교과서를 받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