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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뻑껌뻑 하는 차들이 깜빡깜빡 하는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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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느 날 선생님과 함께 단골음식점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선생님이 갑자기 흥분해서 "껌뻑껌뻑하기만 하면 다야?" 하는 것이었다. 이미 1.5차로가 된 차도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비상 깜빡이'라고 하는 점멸등을 켜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차도는 0.8차로가 되었고 버스 같은 큰 차들은 중앙선을 넘어가며 왕래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약간 흥분해서 차에 앉아 있는 운전자가 들으라고 경적을 울렸다. 그렇지만 그 차는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유기농 과일가게에서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미모의 동행이 차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굳세게 버티고 있을 모양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요?" 내가 휴대전화를 들며 묻자 선생님은 그에 대한 논평은 없이 중앙선을 넘어가는 버스를 가리키며 "저것 좀 봐, 저것 좀. 저게 껌뻑껌뻑한다고 다 될 일이야?" 하고 말했다. 중앙선을 침범한 버스는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경적을 울리고 상향등을 번쩍거리자 역시 비상등을 깜빡거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동네는 수준이 좀 낫네요. 깜빡거리기라도 하니까요." 나는 재빨리 버스 뒤를 따라가며 선생님께 말했다.

"아니야, 이런 게 훨씬 더 염치없는 짓이라고. 저 혼자 편하자고, 남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저렇게 발광을 해대면 그만이냐 말이야. 잘못인 줄 알면 하지를 말아야지, 저따위 발광을 당장 집어치우고."

나는 선생님의 단어 가운데 발광이 빛을 낸다는 뜻의 발광(發光)인지, 미친 증세를 보인다는 발광(發狂)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분은 시인이니까.

내가 운전을 처음 배웠던 15년 전쯤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다른 차를 운전하는 운전자에게 감사나 사과를 표현해야 할 경우에 손을 들어 보이라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비상등을 켜는 것을 사과나 감사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다 아는 일이지만 비상등은 비상시에 켜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수습을 할 수 없게 되면 회피하는 일이 많다. 상관없는 척하거나 모른 체하거나 도망을 가든가, 어디가 아프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길을 막고 서서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상식과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순진무구한 척 눈을 껌뻑껌뻑한다고 다 이해받고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면 아예 이런 경우를 만들지 않는다. 호적상 나이가 많건 적건, 고급 승용차를 몰든 걸어다니든 간에.

성석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