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탈주는 조선조붕괴 일인|정석종교수, 조선후기 노비매매 문기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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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조선후기에 이르러 노비 탈주가 많아졌으며 그것은 농업생산력의 발달, 상공업의 진흥과 새로운 상업도시의 생성, 어촌에 있어서의 새로운 어업경영, 광산지역에서의 새로운 인력의 필요성등이 요인이 되었다.
영남대 정석종교수(국사학)는 최근 출간된 「김철준박사 화갑기념사학논집」에 발표한 「조선후기 노비매매문기분석」에서 이같이 밝히고 노비들의 탈주는 사회여건의 변화와 함께 그들의 사화의식 각성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정교수는 노비제가 조선사회의 신분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어왔는데 노비들의 탈주로 인한 노비제의 붕괴는 곧 조선사회의 신분제 전방의 변혁을 불가피하게했고 결과적으로 조선사회붕괴의 한 큰 요인이 되었다고 풀이했다.
17세기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약2백70년간의 노비매매문서 1백54건을 조사해 이 논문을 쓴 정교수는 노비의 도주가 숙종때부터 심해졌으며 도주 노비에 대한 궁의 적극적인 추적에도 불구하고 18세기에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또 노비의 반항도 심해져 곳곳에서 ?노가 생겨났다고 밝혔다.
노비의 생활실상을 다룬 이 논문은 노비가 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가난해진 부모가 자식을 팔아 넘기는 경우를 들고있다.
「속대전」에 의하면 평상시에는 버린 아이를 데려다 길러 노비로 삼는것은 3살 이전에 국한했지만 흉년이 계속되면 8∼9살에서 15살까지도 노비로 내놓을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이 살기가 어려워 스스로를 파는 일도 많았다.
노비는 매매되었다. 노비를 사고 팔 때에는 목면이나 화폐(후기)를 교환수단으로 삼았다. 17세기초의 노비매매의 한 예를 보면 노비 6식구의 값이 목면4동(소 4마리값 상당)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남자종보다는 여자종의 값이 더 비쌌는데 그것은 자식을 낳을수있기 때문이었다.
노비가 비인간적·비인격적 대우를 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교수는 그때문에 노비의 도주가 심해졌고 체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양반들은 노비가 도망가면 그의 가족은 물론 그 노비와 인연이 있는 노비들까지 혹독하게 징벌했다고 말했다.
노비제에 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당시의 지배계급은 도주노비문제에 엄격했으며 도주노비가 생긴 경우 관청의 추적은 철저했다.
조선사회에서 서자차별문제와 함께 심각한 사회문제를 이루었던 노비문제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부진했다.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뒤따르지 못했고 일본학자가 이문제를 연구해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실정이었다.
정교수의 이번 논문은 이 분야의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중요한 시도로 학계는 평가하고 있다. 학계는 또 노비문제에 대한연구가 19세기 각종 민란에 대한 연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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