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새로운 남자 행동지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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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오래전 남자의 성범죄가 여성 인권과 관련된 사회문제로 인식되던 초기에 한 지인 남성에게 물어보았다. 성범죄 뉴스를 대할 때 남자로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그는 진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의식 같은 거. 내가 행한 일이 아님에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느낌.”

 결혼에 로맨스가 접목된 역사가 오래되지 않듯이 성에 사랑이 접합된 역사도 일천하다. 21세기에 이르러 남자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는 여자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로맨스 영화를 보며 사랑을 배운 여자와 야동을 보며 사랑을 배운 남자가 만나 연애할 때 늘 헛갈리는 대목은 섹스다. 여자들은 자주 남자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만 사용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남자들은 여자가 섹스를 거부할 때 존재 전체를 거절당한 듯 느낀다.

 그래서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진실하지만 복잡 미묘한 사랑을 헤쳐나가기보다는 ‘사랑처럼 보이는 것’을 산다. “매춘업은 남자들의 정서적 가난에 의존하고 있다”는 뉴질랜드 심리학자 스티브 비덜프의 말이다. 정신분석학은 성이 단순히 신체기관 작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안했다. 유아기 성 충동과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 구조와 자기 개념이 만들어진다. 수치심과 경쟁심, 전능감과 위축된 자기 이미지 등이 성 충동 주변으로 형성된다. 성범죄 뉴스를 접할 때 느끼는 죄의식도 그곳에 뿌리를 둔다.

 남자들은 이제 성 의식을 정립하고 성과 관련된 행동 규칙을 익히는 새로운 과제를 안은 듯 보인다. 연전에 한 대학 강사 휴게실에서 성추행이 될 수 있는 행동을 규정해둔 공지문을 본 적 있다. 스무 개쯤 되는 항목에는 “뒤에서 안듯이 접근하면서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번에는 군부대에서 성추행을 피하기 위한 남자 행동 지침을 내놓았다. 여자와 악수할 때, 여자와 좁은 공간에 머물 때 어떻게 하라는 규정이다. 여자를 통제하던 과거의 방식을 남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바꾼 셈이다. 차라리 “모든 여자를 내 누이나 어머니라고 생각하라”는 불교 계율이 나아 보인다.

 몇몇 남자가 저지르는 성범죄 때문에 다수의 남자가 무의식적 죄의식을 감당하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남자에게 행동 규칙을 쥐여주는 일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인식의 변화다. “여자가 성적 대상이 아니라 남자와 똑같은 감정, 생각, 인격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인식이 서야 한다. 문제는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조차 무지하다는 점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