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승자·패자 모두 정체성 확보가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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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민심이 정부와 여당을 이반한 책임은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나누어 져야 한다. 불과 일 년 반 전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업고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후 열린우리당은 무엇을 했나. 국민이 제공해 준 의석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국민이 바랐던 정치개혁을 적극 추진했던가. 지역주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고 창당한 이후 탈지역 정책정당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적극적으로 기울였나.

최근 한나라당이 제기한 정체성 논쟁을 단순히 해묵은 색깔론 공세로 일축해버린다면 열린우리당의 미래는 없다. 스스로 사회주의 좌파 정당이 아니라고 얘기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념과 정책과 조직과 지지기반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드러나는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과제다. 섣부른 정국개편 시도나 사소한 지도부 개편에 앞서 열린우리당이 근본적으로 고민해 봐야 할 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이다.

결국 한나라당의 압승은 정부와 여당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져다 준 반사이익이었다. 한나라당이 이를 애써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나라당은 유권자들에게 민생을 외면한 여당에 대한 심판을 요구했고 국가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응징을 요구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선거 결과에 대한 자만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원내 의석이 네 석 늘었지만 원내 세력구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 역시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만큼 상대 후보를 따돌리지도 못했다. 물론 현재와 같은 지도력과 전술로 대여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면 내년 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또다시 승리할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그 다음 대선에서의 승리를 과연 한나라당은 장담할 수 있을까.

지방선거와 재.보선 승리에 도취해 있다가 정작 중요한 대선에서 번번이 패배했던 것이 최근 한나라당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당이 필요로 하는 것 역시 자기 혁신을 통한 건설적 정체성 확립이다. 구태의연한 색깔론 공세나 지역주의 정서 자극 혹은 대안 없는 무차별적 정치공세로 작은 전투는 이길 수 있겠지만 큰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작은 승리에 도취해서 수구적 지역주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불식시키지 못할 경우 이번 승리는 한나라당에 약이 아니라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정치적 노동운동의 최고 아성을 다른 당도 아닌 한나라당에 내준 민주노동당 역시 도약과 쇠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조운동이 내부 균열과 도덕성 파탄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현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유일한 진보정당으로 살아남기 위해 정책노선과 지지기반에 관해 심각한 고민을 해 봐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결국 이번 재선거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던진 과제는 정책적 정체성 확립이다. 중부권 신당과 민주당이 합쳐서 지역에 기반을 둔 새 정당이 출현하려 하는 등 정당정치가 다시 지역주의에 매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여전히 영남 패권에만 안주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건강하고 건설적인 보수정책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각각 어떻게 탈지역 정체성을 확립해서 잃어버린 지지를 다시 동원해 낼 것인가.

이번 선거 결과가 진 쪽 이긴 쪽 모두에게 한국 정당정치 진일보를 위한 자극제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