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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양이 늪' 주연 서이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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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 여인,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다. "그런데요?"라며 툭 던지는 말, 어딘가 냉소적이고 쓸쓸하다. 하지만 무대위에 서자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낸다. 힘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무대 구석구석에서 꿈틀댄다. 핏발 선 눈에선 광기의 그림자마저 언뜻 비친다.

배우 서이숙(37). 연극판에 몸담은 지 어느새 20년이 된 관록파다. 2년전 첫 주연을 맡았던 '허삼관 매혈기'로 동아 연극상과 히서 연기상을 받으며 뒤늦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여전히 낯선 연극인이다. 그녀가 이번에 또 제대로 된 작품을 부여 잡았다. 다음달 1일부터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2주간 공연되는 연극 '고양이 늪'이다.

고양이 늪은 아일랜드의 세계적 극작가 마리나 카(41)의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극을 원형으로 한 희곡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카는 이 작품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풀어놓는다. 베테랑 여성 연출가 한태숙(55)씨의 초현실주의 연출 기법과 만난 작품은 디딜수록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늪처럼 음습하다.

어머니와 남편에게 차례로 버림받는 여주인공 헤스터가 서이숙의 배역. 그녀의 연기는 전율처럼 다가온다. 목소리엔 기구한 사연이 풍긴다. 절절한 아픔을 겪고도 무심히 삶을 응시하는 처연함. 아일랜드 뮤지션 시너드 오코너의 수척한 듯 차가운 음색과 닮았다.

외모는 영화 '피아노'의 홀리 헌터를 연상시킨다. 가냘프지만 고난을 견뎌내는 강인함이랄까. 무엇보다 그녀 연기력의 본질은 '존재감'이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홀로 무대를 꽉 채울 수 있는 내공이란 아무나 뿜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연출가 한태숙씨 역시 희곡을 받아보는 순간 "헤스터를 소화해 낼 수 있는 건 서이숙밖에 없다"고 확신했단다.

서이숙의 실제 삶에도 어떤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건 아닐까. "글쎄요. 잊고 지냈지만 돌이켜보니 저에게도 한이 있네요. 중 2때 아버님이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20대 초반 하나뿐인 남동생이 사고로 죽은 일, 결혼을 약속한 남자 집안에서 홀어머니 슬하란 이유로 반대해 결국 헤어진 일 등등." 어찌 보면 절절하고, 달리 보면 누구나 가슴 한 켠에 담아둘 법한 사연이다. 중요한 건 각인된 아픔을 체화해 이를 연기로 뽑아내는 힘이리라.

경기도 연천에서 자란 서이숙은 고교시절 배드민턴 선수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들어간 곳이 연천 농촌진흥청.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을 탈출하고자 지역 극단의 문을 두드렸다. 1986년도 일이다. 돈 한푼 받지 못하고 무대에 오르던 그녀는 3년 뒤 극단 미추로 옮겨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거기서 스승 손진책에게 판소리도 배우고, 마당놀이도 하고 뮤지컬도 기웃거려 보며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 이제 30대 후반, 농익은 연기력이 광기어린 헤스터와 만났다.그녀는 올해 연극계가 새삼스레 길어올린 값진 배우임에 틀림없다. 공연문의)02-744-7304

글=최민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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