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8)|<제80화> 한일 회담 (7) 정치 의견서 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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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으로부터 대일 강화 조약 초안을 받아 우리 정부에 보내놓고 있던 주미 대사관측도 그에 대한 정부의 훈령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장면씨의 총리 취임으로 대사직이 2개월간 빈 사이 사실상 대사관의 경무를 관장했
던 한표욱 1등서기관 (주유엔·주영 대사 등 역임)의 회고-.
『주미 대사관이 한일 문제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51년3월께부터였다,
그때 미국은 「애치슨」 국무장관의 진두 지휘 아래 「존·포스터·덜레스」 특별 보좌관(「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 역임)과 「엘리슨」 차관보가 한팀이 되어 전승 연합국과 패전 일본간에 평화 조약의 초안을 작성 중이었다.
국무성은 3월20일을 전후해 1차 시안의 내용을 주미 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통고했다. 그 내용은 일본 정부에도 동시에 통고됐는데, 미국은 초안을 충분히 검토해보고 한국의 입장에서 꼭 첨부할 견해가 있으면 의견을 제출해 달라고 주문했다.
약 3개월간 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후속 지시를 받지 못하고 있던 동년 7월7일 국무성은 또다시 2차 시안 내용을 주미 대사관에 알려왔다.』
2차 시안이 주미 대사관에 수교될 때까지 우리 정부의 훈령이 못 나간 데는 우선 우리가 1차 시안을 늦게 입수한 데다 그것을 정치하게 검토해 정부의 입장을 통합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귀속 재산 문제의 제기를 반대 한데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대통령은 장 총리와 김준연 법무장관 등이 귀속 재산에 관한 법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맥아더」 장군이 나한테 한말이 있는데』하면서 초안의 수정 요청에 찬성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 당시 경무대비서로서 이 건에 관계했던 임철호씨가 나와 이건호 고대 교수
(현 국회의원), 임송본 당시 식산 은행 총재, 정부의 홍진기·최규하·김동조씨 등을 모아 이 초안을 여러 차례 검토했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정부안에서 이 문제를 가장 이해하고 우리의 주장을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던 두분의 고위 공직자는 장 총리와 김 법무장관이었다.
이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우리는「무초」 주한미 대사를 찾아보도록 까지 했다. 아마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최두선씨가 「무초」 대사를 만나 우리 입장을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무초」 대사는 곧 우리의 말을 이해하는 눈치를 보였는데 그가 이 대통령을 만나 설득을 시도했던 것 같다.
하옇든 이런 곡절 끝에 이 대통령의 이해를 얻고 4월16일 외무부에 「대일 강화 회의 준비 위원회」의 구성을 보게 돼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위원회를 외교 위원회로 불렀는데 위원으로는 장총리·조병옥 내무·김 법무장관·배정현·최두선·홍진기·이건호씨·박재섭 고대 교수와 본인 등이었다. 홍 법무국장이 간사를 맡았다.
위원중에 외무부 관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 피난수도에서
외무부 직원이라고해야 수십명에 불과한데다 그들은 모두 전시외교를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
태였다.
의견서 작성에 있어서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대한민국을 대일 평화조약 서명국의 하
나로 할 것을 요구하는 여부였다.
만일 우리나라가 강화조약 서명국 중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일본에 대해 전승국의 지위를 갖게 되며 따라서 전쟁 배상을 받을 수 있음은 물론, 기타 모든 문제에 있어 절대적
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너무도 정치적이며 또 중경 임시 정부 시대이래 여러번 논의되어 오던 것이었다. 위원회는 우선 이를 제1항으로 요구키로 했다.
위원회는 여러 차례의 토의를 다음 5가지 항목으로 집약했는데, 이를 간사인 홍 국장이 기초했다.
①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는 한국도 참가, 서명해야 한다. ②귀속 재산과 대일 청구권 문제 ③어업 문제 (이때는 아직 평화 선이 없었다) ④통상 문제 ⑤재일 교포 문제.
이것을 그 당시 외무장관 변영태씨가 손수 영역하고 장 총리가 수차 강력히 권해 이 대통령의 승낙을 얻어 미국에 요청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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