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규 칼럼] 은퇴설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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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한국투자
증권 Life컨설팅부
부장

자신이 처한 현실이 자신의 신념이나 태도와 다를 경우 나타나는 심리적 불안정을 뜻하는 말로 ‘인지적 부조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지적 부조화 상태에 부딪치면 합리적인 방법으로 현실과 신념의 차이를 조정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현실 또는 신념을 수정한 것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하며 적응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입니다. 포도를 먹고 싶지만, 온갖 애를 써봐도 먹을 방법이 없는 여우는 포도 따 먹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포도는 다 익지 않아 시고 맛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신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포도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이러한 합리화는 당장은 가장 손쉽고 편하며, 안전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포도를 먹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포도를 먹게 되더라도 진짜 신 포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퇴설계에도 과연 이러한 인지적 부조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은퇴설계라고 하면 노후에 필요한 생활비의 수준을 제일 먼저 떠올립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필요하다’라는 신문이나 방송 기사를 참고하여 모을 수 있는 노후 생활비 수준을 계산해 보고는 잠시 실망합니다. 하지만 곧 정상 상태로 돌아옵니다. “어찌되겠지”,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저 정도로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등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마다 계획하고 꿈꾸는 노후생활의 모습과 수준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은퇴설계의 목표와 방법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설계한 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중간에 수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은퇴설계를 하면 계획한 그대로 노후생활이 보장되거나, 아름다운 노후, 풍족한 노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계획과 실행 사이를 조정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은퇴설계는 일회성이 아니라 은퇴 전·후에 걸친 계속 진행형의 과정입니다.

혹시 지금 은퇴설계를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박상규 한국투자증권 Life컨설팅부 부장

PS) ‘여우와 신 포도’의 계속 된 이야기
우여곡절 끝에 여우는 포도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신 포도였습니다. 여우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 잡습니다.
“이 포도는 달다. 매우 달다. 이때까지 먹은 어떤 포도보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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