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유심히' 또는 '무심히' 바라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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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는 우리 삶에서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것을 이로정연하게 정리하는 어떤 측면에 주목한다. '유심히' 관찰하는 일은 의식의 몫이다. 의식의 몫, 논리의 몫, 이것이 바로 학문의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또 우리 삶에서 어떤 진실이 '무심코' 발화되고, 이것이 이야기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전승되는 어떤 현상에 주목한다. 어떤 진실을 '무심코' 발설하는 일은 무의식의 몫이다. 무의식의 몫, 감성의 몫, 나는 이것이 신화, 또는 설화라고 생각한다. 삶은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온전해진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다. 나는 '유심'의 세계, 곧 의식의 세계를 주목한다. 그러나 '무심'의 세계, 곧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두 세계를 아울러 주목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전모에 더 다가서려는 몸짓일 터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사람의 삶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물리적인 생활의 측면, 물리적 삶으로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정신적인 존재의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도서전시회장에서 약간 들뜬 김에 조금 거칠게 이분법 쓰는 것을 양해하시기 바란다. 책은 생활의 측면에 속하는 물건이다. 따라서 책은 물리적 생명 연장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다. 생명의 연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에, 세계가 왜 이렇게 들떠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인가? 대답하기 어렵지 않다. 책이 바로 존재라고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 측면을 떠받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한국어는 한국인들 생활의 한 수단과 방식이기도 하고, 한국인의 존재의 집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그 한국어에 노벨 문학상이 얹힐 뻔했다. 얹히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얹힐 뻔했다는 것은 거의 얹혔다는 뜻이다.

공업의 나라라고 불리는 독일, 그 나라 주요 도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자리는 놀랍게도 상당수 우리나라 대기업들 차지가 되어 있다. 그 기업들이 생산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생활의 측면에 봉사하는 것들이다. 독일인 친구에게 소형 컴퓨터 자료 저장장치를 하나 사다줄 것을 부탁했다. 사온 것을 보니 한국산이었다. 그것밖에 없더라고 했다. 참 빠른 속도로 달려왔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하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존재의 측면이 상대적으로 초라했다면 나는 이렇게 들뜨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 고은, 소설가 조정래, 황석영, 이문열, 이분들은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쓴다. 이분들이 사유하는 한국어는 곧 한국인들 존재의 집이기도 하다. 이분들이 모두 여기에 와 있다. 유럽의 한복판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시회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대받았다는 것은 유럽인들이 한국어를 세계의 주요 언어로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나는 푼다. 한국인들 존재의 집을 세계인들 정신의 거처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푼다. 세계가 공인하는 문호와 시성(詩聖)과 악성(樂聖)을 무수히 보유했던 나라에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 특히 로마자와 키릴 문자를 많이 쓰는 동유럽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우리 문학의 미래, 한글의 미래를 생각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수백 년 동안이나 같은 문자를 통해 문학을 끊임없이 계승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문학의 도구로 우리가 써온 한국어와 한글의 나이가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유심'과 '무심', 생활과 존재를 아우를 수 있어야, 삶은 강처럼 저절로 깊어지고 넓어질 것 같다. 문학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삶조차도. 책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이윤기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