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법관 다양화 명분 아래 외부 입김 없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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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용훈 대법원장이 김황식.김지형.박시환 세 사람을 새 대법관 후보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임명제청함으로써 대법원 구성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대법원 측은 "대법원장이 각계 의견을 고려하고 판결 성향, 출신 대학 등에 대한 심사를 거쳐 제청자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법관 출신이고 박시환 변호사는 시민단체들에 의해 끊임없이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명돼 왔다. 외형상으론 법원 내 주류와 비주류 법관, 재야 법조계에서 한 명씩을 발탁함으로써 균형을 맞췄다. 그러나 진보 성향 단체와 노동계가 지지한 인물이 두 자리를 차지해 결과적으로 법원 밖의 목소리가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정권의 실세인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법조인과의 사적인 모임에서 일찍이 대법관 후보로 언급한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포함됐다. 그래서 '코드 인사'란 말이 나온다.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한다는 명분은 내세웠으나 결국 현 정부의 진보 성향에 맞는 인물들을 주로 선택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내년 7월과 9월 각각 교체되는 대법관 5명 및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재 재판관 5명의 후임자도 이런 방식으로 채운다면 사법부가 진보적 색깔로 크게 바뀔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대법원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몰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다양화라는 명분으로 특정 대학에 불이익을 주는 것은 문제다.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대법관으로서 자질을 갖추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번 인선에서 논란의 대상은 박시환 변호사다. 그는 법관 시절 즉심에 넘겨진 시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종교를 이유로 한 병역 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병역법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또 진보 성향의 법조인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를 이끌었는가 하면 지난해 대통령 탄핵 심판사건 때는 대통령 측 대리인으로 참여했다. 법관으로서 소수자나 약자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갈등과 분쟁의 최종 판단자인 대법관은 다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관과 법 해석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병역 거부의 경우만 해도 종교.양심의 자유가 무한정한 것이 아니라 법률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는 게 정설이다. 지난해 7월 대법원이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도 보장될 수 없다"며 양심의 자유를 이유로 한 입영 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법관 인선에 외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 등을 명분으로 일부 시민.이념단체가 지지.추천하는 인물이 우대받는다면 법원에 남아 묵묵히 재판 업무를 담당해온 법관들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판결로 말해야 할 법관이 목소리 큰 외부 단체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의 성향에 맞는 판결을 내려 승진의 발판으로 삼으려 할 때 사법권의 독립은 기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