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2)제79화 육사졸업생들(215)월남파병의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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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0기생들이 월남에서 용맹을 떨친 이야기에 앞서 우리나라가 월남에 파병을 하게된 배경과 그리고 당시 한·미·월 세나라 사이의 관계등을 살펴보고 넘어갈까한다. 왜냐하면 월남파병이 우리나라에 미쳤던 영향이 너무나 지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군대를 외국에 파병한 역사는 13세기 고려 충렬왕때와 조선 광해군때라고 알고있다. 강압에 못이겨 여·원연합군을 편성해 일본을치기위해 현해탄을 건넜였고 13세기조선 광해군때는 명나라의 요청과 명나라와의 의리를 끊을수없어 어쩔수없이 청주에 파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자의에 의해 해외에 군대를 파견한것은 월남전이 처음이 아닌가한다.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1885년부터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대전말 일본의 침략을 받아 당시 프랑스 군대가 물러갔으나 45년8월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다시 프랑스 통치하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41년부터 호지명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은 하노이를 중심으로 월남독립련맹(월맹)을 조직, 반일·반불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고 호지명은 45년8월29일 베트남 임시 정부를 수립, 대불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54년 제네바회의에서 인도지나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북위 l7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은 월맹으로, 남쪽은 월남으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55년10월27일 북위 17도선 이남에 세워진 「고·딘·디엠」 정권을 승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있다.
「고·딘·디엠」정권이 수립후 프랑스는 55년 군대를 철수했으며 월남정부는 미군사고문단을 받아들여 월남군을 훈련시켰다. 그려나 60년초에 이르러 베트콩 게릴라가 곳곳에 출동하면서 월남정세가 악화돼 미국정부는 본격적인 군사원조와 병력을 증강, 63년에는 주월 미군사원조사령부를 사이공에 설치하기까지 했다.
64년에 접어들어 미국은 월남정부전복을 기도하는 베트콩 게릴라에 대응해서 월남전에 적극 개입하기로 결정,SEATO각료이사회와 NATO를 통해국제경찰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의 이같은 노력도 프랑스의 반대에 부닥쳐 좌절되자 당시 「존슨」대통령은 미국단독으로 25개국 정부에 대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러 영국·서독·뉴질랜드·호주·말레이지아등 14개국이의료단과 군수등 비전투부대의 지원을 하게됐던것이다.
미국이 월남에 군사원조사령부를 설치할 무렵 우리나라는 박정희장군이 민정이양을 약속했다가 63년3월16일 번의, 다시 군정4년 연장을 발표함으로써 정국이 큰 혼란에 빠졌던 시기였다. 설상가상으로 7월초순부터는 극심한 가뭄으로 중부지방의 논바닥이 갈라지고 영남지방은 수해로 논밭이 물에 잠겨 민심마저 흉흉했다.
63년8월9일 박정희의장은 김성은국방장관을 위시해서 민기직육군참모총장·이맹기해군참모총장·장성환공군참모총장·김두찬해병대사령관등 참모총장단을 대동하고 영남지방 수해를 시찰 나갔다가 진해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날 저녁 늦게 마른오징어를 뜯어놓고 소줏잔을 기울이던 자리에서 박의장은 갑자기 월남이야기를 끄집어냈다고 한다.
『미국이 틀림없이 월남전에 깊숙히 개입할것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우리에게 파병을 요청해 올지도 모르겠다』면서 각군 총장의 의견을 물었다는 것이다.
이때만해도 각군참모총장의 입김이 셌던것으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그해3월22일 김성은국방장관이 전군의 장성 2백3명을 국방부에 긴급소집해서 『군사혁명이 유종의 미를 거둘수있도록 전군은 민선정부가 구성될때까지 일치단결하여 박의장을 밀겠다』는 「군정연장지지결의」를 하고 장성들이 1백대의 지프에 나눠타고 「국방부에서 청와대까지」 가두 퍼레이드를 벌이는등 박의장에게 힘(?)이되어준 직후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2군사경관에 있을때여서 이 퍼레이드에 참가했었지만 이를 계기로 박의장은 각군 참모총장들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던것으로 알고있다.
김국방장관이하 각군 총장들은 진해별장의 소주파티에서 군사혁명후 파생된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미국이 만일 파병요청을 해오면 이에 응하는것이 옳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박의장은 그후 그해 10윌 총선거를실시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2월17일 정식으로 제3공화국의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민정이양은 실현되었지만 국내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식량부족 현상과 미국의 「군원이관」에 따른 군사원조의 삭감으로 재정부담마저 가중돼 제3공화국은 출범초부터 어둡기만 했다. 여기에 야당과 학생들의 반발은 급기야 「6·3사태」로까지 번져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월남파병이이루어진 것이다.당시만해도 월남파병이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적·정치적 어려움을 타결해주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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