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선두2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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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일찌감치 2세로의 승계가 끝난 경우로는 쌍용 동아건설 효성 기아산업 대한전선 금호그룹등을 꼽을수 있을것이다.
이중에도 특히 쌍용의 김석원회장(38)이나 동아건설의 최원석회장(40)등을 이른바「선두2세」라고들 부른다.
우선 이들의 연령이 「젊은 승계자」로서 걸맞을뿐 아니라 승계받은 기업들을 선대이상으로 키워놓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들보다 더 이론적 승계를 받고, 더 큰 기업을 경영했었다해도 결과적으로 선대의 사세에 흠을 낸 2세들은 일단 뒷전으로 밀려날수밖에 없다.

<오직 결과로 평가>
한마디로 2세를 재는 자는 오직 경과만을 따져 묻는다. 부자집아들로서의 행실이나 사생활이 어떠했든간에 중요한 것은 「물려받은 사업을 어떻게 키워 나가느냐」로써 사업가로서의 2세를 평가하는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쌍용의 김석원씨나 동아건설의 최원석씨는 선대의 사업을 이어받아 오히려 더욱 번성시켜 놓은 케이스들이다.
김석원씨가 쌍용의 총수자리에 오른것은 75년 갑작스런 부친김성곤씨의 사망때문이었다. 당시 나이 만30세.
『정말 회장자리를 맡을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었읍니다. 그저 주위의 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려 있다는것과 따라서 내가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었을 뿐이지요.』
부친의 급작스런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것은 미국에서였다. 그는 당시 자신의 독자적인 사업으로서는 첫작품인 용평스키장 일로 미국에 가있던 참이었다.
당시 김성곤회장 눈에는 아직도 철부지아들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스키장만해도 『뭔가 제힘으로 해보겠다고 설치고 다니니 한번 해보라』는 식의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다.
『한번도 아버지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적이 없었어요. 내가 생각해도 선친은 자녀교육에 관한한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던만큼 나이 서른밖에 안되는 아들놈에게 사업의논을 했을리 있었겠읍니까.』
8년전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 김씨는 한마디로 앞이 캄캄했었다고 말한다.
더우기 당시 쌍용은 막대한 투자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하던때였다. 5백60만t짜리 시멘트공장을 증설하는것을 비롯해서 이란과의 합작으로 정유공장설입계확이 입안될때였다.
『회사내부의 인맥에 대해서조차 백지상태였읍니다. 사람을 알아야 쓰지요. 심지어는 중역들끼리 서로중상모략을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었고, 이러다간 정말 큰일나겠다 싶었읍니다. 회사기강을 위해서 할수없이 사표를 받지 않을수 없었읍니다.』
그가 첫번째로 밀어붙인 사업은 모든 업무의 전산화였다. 고참중역들이 가만있지도 않았다.
『실정 모르는 젊은 회장이 미국에가서 공부했답시고 컴퓨터병이 들어서 회사 말아먹는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전산화부터 착수>
5년동안 무려 40억원을 전산화사업에 털어넣었다.
이젠 그의 사무실 집무 책상위에 놓여진 단말기만 두드리면 재고로 쌓여있는 시멘트가 몇부대인지부터 시작해 재무·인사등 모든 정보를 미주알 고주알 즉시즉시 파악할수 있게되어있다.
『회사경영을 맡고나서 5년동안 신규투자한 돈이 무려 3천억원에 달합니다. 80년을 고비로 한숨을 돌렸읍니다만 돌이켜보면 아질아질하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한편 동아건설의 최원석회장역시 2세그룹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으나 승계과정에 있어서
쌍용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여준다.
최씨는 부친 최준문씨로부터 비교적 일찌감치 승계자로서의 경영훈련을 받아온 셈이다.
회장자리에 오른것은 77년이었으나 이미 65년부터 총무과장에서 시작해 동아건설·대한통운사장등을 통해 경영수업을 쌓아왔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했다. 앞의 김성곤씨가 통큰 방관주의자였다면 잘 알려져있는대로 최준문씨는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야 직성이 풀리는 철두철미한 현장확인주의자였다. 아들에게 회장자리를 물려주고서도 「총회장」이라는 기발한 직함을 만들어 실질적인 대권을 행사했다.
『현장을 따라다니며 아버지가 일처리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배웠지요. 그러나 정말 내가 이 회사의 책임자로구나 하고 느낀것은 역시 부친이 병으로 몸져 누운 78년이후였읍니다.』

<실패했으면 자살>
그의 이같은 말은 어찌 생각하면 그제서야 자기책임아래 소신껏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사실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지금의 동아그룹을 일으킨 창업자 아버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한때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말썽꾸러기 아들이었고 앉아서 돌다리 두드리기 보다는 일을 만들고 모험을 즐기는 타이프였다.
아버지의 걱정을 단번에 만회한것은 중동진출의 길을 연것이었다.
『글쎄요. 어쨌든 당시로서는 꼭 나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결과적으로 잘됐으니 망정이지 만약 실패로 끝났다면 분명히 자살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겁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선 사우디아라비아공사가 성공적으로 맞아떨어졌고 단점으로 지적받던 무모함이 오히려 과단성있는 사업수완으로까지 평가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젠 2백억원짜리 다리를 헌납하는가하면 모두가 고개를 내젓던 공영토건까지 맡았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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