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해병정신이 내 삶의 밑거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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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62126. 김태문(69)씨가 40여 년 동안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숫자다. 하지만 6월 중순에는 사정이 달랐다. 5월 말 느닷없는 고열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20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그는 문득 이 숫자를 떠올릴 수 없었다. 임파선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 못지 않은 충격이었다.

"의사들은 낙관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저는 곧 죽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어요. 평생 함께 해 온 해병대 군번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군번을 잊어버린 해병은 가짜'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김씨는 죽음을 맞기 전에 자신과 했던 약속을 서둘러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해병전우회에 성금을 내놓는 것이다. 그는 6월 22일 병실로 찾아온 김명환 전우회 총재에게 노후자금으로 모았던 5000만원을 건넸다. 전우회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금이었다.

"대학(고려대 정치외교학과)을 졸업한 1960년 해병학교에 입학했어요. 10개월 교육을 마치고 13년간 해병장교로 복무했지요. 소령으로 제대한 뒤 쌍용그룹(홍보실장, 중앙연수원장 등을 지내다 97년 퇴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해병대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김씨는 해병대에서 정신과 육체를 강하게 단련한 것이 평생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사고와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힘, 고난을 이겨내는 불굴의 정신도 해병대에서 배웠단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동료들끼리 손에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눴던 전우애도 일생 동안 그를 지탱해 주었다.

"예비역 해병인 전우회 회원들이 전국에 80만 명 쯤 됩니다. 이들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등 대형 사고와 재해 현장에서 봉사하며 해병대 정신을 발휘해 왔어요. 제가 비록 몸이 아파 함께 할 수 없지만 격려의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김씨의 투병과 성금 전달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전우가 그의 병실을 찾았다. 그 덕분일까. 김씨는 고비를 넘기고 세 차례의 항암치료까지 무사히 마쳤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은 약해졌지만 그는 "해병대 지옥훈련도 받은 내가 이 정도도 못 견디랴"는 각오로 버티고 있다고 한다.

몇 차례의 항암치료를 앞두고 있는 그에게 "치료비며 노후 대비는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다(김씨는 올 6월 모교인 고려대와 마산 용마고에도 각각 1억원과 1000만원을 기부했다).

"기부금 규모가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온 나로선 적지 않은 돈이죠. 하지만 가진 걸 나누고 나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야 아껴쓰다 모자라면 집 팔아서 줄여가면 되지 싶어요."

김씨는 평소 세 자녀에게도 "공부시켜 주고 시집장가 보내줬으니 남은 돈은 좋은 곳에 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단다. 95년 부인과 함께 고려대 의대에 시신기증 서약까지 한 김씨를 지켜보고 동의했던 자녀들이기에 이번 기부 역시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저는 곧 '4차 전쟁(항암 치료)' 치르러 갑니다. 해병대 정신으로 이겨낼 겁니다."

글.사진=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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