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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위에 대한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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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스미소니언 연방 미국사 박물관에는 '영광의 책무'로 명명된 미국 대통령의 지위를 일곱 가지로 분류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방이 있다. 그 지위란 연방 지도자, 정당 지도자, 군 통수권자, 외교 수장, 의전상 국가 원수, 행정부 수반, 그리고 경제 관리자다.

다양한 직무를 적절히 배분하는 이 분류가 연상시킨 것은 동네북이 된 우리 대통령의 처량한 신세였다. 대통령이 잘못한 바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그를 마치 전제군주와 같은 무소불위의 지위에 놓고 몰아붙이는 편향되고 감정적인 비난들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의 무한책임론에는 그를 '공화제의 군주'로 삼아 '잘된 것은 각자의 몫으로, 잘못된 것은 군주의 몫'으로 돌리고 싶은 어설픈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대통령도 미국처럼 다양한 책무를 부여받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절름발이 취급을 당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경제 올인"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주장들만 듣다 보면 경제 관리자 외의 모든 직무를 포기해야 할 판이다. 경제 전문가로 실무를 주관하는 경제관료나 근거법을 마련해야 할 국회의 책임론은 그늘에 가려 있다.

무한책임론자들이 가장 경시하는 대통령의 직무는 정당 지도자로서의 직무다. 전체 국민의 영도자로서 특정 세력의 대변자로 나대는 편협한 태도는 버리란다.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책들을 분열적이며 통합을 해치는 것이라는 공허한 이유를 들어 그만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한 정파의 지도자이기보다는 국정 책임자로서의 영도적 지위로 대통령직을 획일화하는 태도는 제왕적 대통령에 의한 독재의 시대에 정치적 다원주의의 현실을 파당정치로 매도하면서 허위에 찬 국민총화를 추구하던 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

전제군주가 아닌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체제에서 통합은 절차적 전제조건이지 실체적 이상 그 자체는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은 자연인인 군주처럼 현실적 단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개인이 저마다의 능력과 욕망을 가지고 다양한 생활관계 속에서 국민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의사는 신의 계시처럼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유동적인 정치적 의사 결집의 과정을 거쳐 결정될 뿐이다. 대통령에게 마치 신의 대리인인 전제군주처럼 하나뿐인 국민의 의지를 단순히 대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헌법이 기대하는 바도 아니다.

수도민과 지방민, 강남민과 강북민, 부유층과 극빈층, 주택 보유자와 무주택자,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 민주화 투사와 고문 기술자, 노장년층과 청소년층 등으로 구분되는 국민의 다양한 사회적 기반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중 누구의 의견을 국민의 의견이라고 할 것이며, 중층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개인들은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기득권을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해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불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마치 자신의 이해관계가 공동선인 것처럼 국민을 들먹이며 대통령에게 무한책임을 들이대는 방식은 비겁하며, 이것이야말로 지양해야 할 포퓰리즘이다.

무수히 많은 국민의 의견 가운데 무엇이 최선인가를 선택해 그 실현을 추구하는 집단이 정당이다. 대통령은 복수로 존재하는 정당의 한 지도자로 그 정당이 정강으로 내건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현대국가의 기본적 구조다. 이러한 정당 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의 지위를 부인하고 중립적 국정 영도자로서의 지위만을 강조하면서 책임정치를 논하거나, 여당과 야당을 구분하거나, 재.보선이나 지방선거를 국정에 대한 심판으로 규정해 저주의 굿판으로 삼는 것은 모순이다. 대통령은 전제군주가 아니라는 근대적 현실인식으로부터 현안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