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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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기암절벽이 바다 가운데까지 둘러서 있고 골짜기가 깊게 뚫렸는데 곶은 백여 리에 이르고 수세(水勢)가 거꾸로 휘돌아서 근처의 임당수는 뱃길이 몹시 험하였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명주실처럼 가는 모래가 수십 리에 깔렸는데 밤새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해변의 사구(砂丘)가 나날이 이동하는 것이었다.

갯가에 게딱지 같은 집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고 마을마다 아름드리 해송이 몇백 년씩 나이를 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산세가 험하고 모래가 대부분인 해변에서 농사라야 수수나 기장 따위가 고작인 어촌 사람들은 진작부터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열흘 길, 보름 길, 어떤 때엔 한 달 이상씩 걸리는 긴 뱃길에서 풍어의 기쁨은 쉽게 잊혀지는 대신 수많은 사람이 풍랑에 삼켜져서 그 슬픔만이 오랫동안 남아 있곤 하였다.

마을이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곳 바닷가에는 매가 날아와 살았으니, 나라의 응방(鷹坊)에서 이 지방 매를 특산품으로 정하여 관가에 바치도록 하였는데, 특히 대청도의 이른바 해동청 보라매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매가 드나들고부터는 잡새가 얼씬하지 못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더욱더 매를 소중하게 알았다. 그들은 먹이를 주어 매를 돌보고 둥지도 지어주었으며, 고깃배가 출어하기 전날의 풍어제(豊漁祭) 때에는 매를 가장 귀한 제주(祭主)로 알게 되었다.

새벽에 주변의 섬으로 놀러 나갔던 매는 황혼 녘이면 돌아왔다. 그러고는 마을 상공을 늠름하게 한 바퀴 돌고 나서 당솔나무에 앉아 쉬거나, 마을의 지붕에 내려와 아이들의 찬탄 섞인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귀다 갔다. 고깃배가 출어하면 매는 한나절 거리는 좋이 됨직하게 따라왔다가 해변으로 돌아갔고, 그들이 만선의 북을 두드리며 포구로 돌아오면 벌써 매는 날씬한 날개를 펴고 황포의 돛 위에 날아 앉거나, 마을 부녀자들에게 그들의 무사 귀환을 알리기 위해 재빠르게 날아가는 것이었다.

민담은 이러한 매와 공동체의 평화스러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어디에선가 찾아온 타자임을 말해 준다. 황해바다 해안에 자주 출몰하던 이국 배들을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불렀는데 관리가 나와서 형식적인 교역을 치르고는 달래어 보내려 하였다. 그는 마을 부근에 날아다니는 매를 보고 배의 화주에게 주어 좋은 물건을 얻고자 했다. 매를 사랑한 어느 아이가 매를 그물에 씌워서 다치지 않도록 해놓고는 당집에다 숨겨 두었다. 타국의 배가 떠나자 관리도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빼앗길 뻔한 매를 당집에서 꺼내어 날려 주기 전에 의논을 하였다.

이것은 우리 마을의 매요.

아무렴, 우리 마을을 지키는 매지.

하마터면 남에게 빼앗길 뻔했소.

표를 해둡시다.

마을 사람들은 매의 오른발에 붉은 색실로 매듭을 묶어 준 다음 놓아주니, 매는 다시 자유롭게 떠올라 마을 상공을 한 바퀴 휘돌아보고 나서 바다로 날아갔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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