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프랑스 테러에서 우리 사회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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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증오는 선술집 깊숙이 웅크린 술주정뱅이 /잘라도 잘라도 다시 나는 칠두사(七頭蛇)처럼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네 /행복한 술꾼은 쓰러져 잘 줄 알지만 /증오는 식탁 아래서도 잠 못 이루는 /서글픈 운명으로 태어났다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중 ‘증오의 술통’은 이렇게 끝난다. 괜히 위대한 시인이 아니다. 누가 이보다 더 잘, 증오의 슬픈 진면목을 묘사할 수 있으랴 싶다.

 그런 시인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서가 아니라, 자기의 신을 조롱한 만화가들에게 삿대질해서 풀릴 거라면 증오가 아니었을 터다. 소총으로, 로켓포로 신성모독을 응징하고서도 감기지 않는 게 증오의 두 눈이다. 증오란 결코 혼자 다니지 않는 까닭이다. 편견과 아집, 오만과 독선이 흔히 증오와 동행한다. 만평을 만평으로 봐줄 이성과 분별은 같이 노는 물이 아니다.

 증오는 자연 치유되는 법이 없다. “증오란 약자의 분노”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말이다. 이것 역시 곱씹을수록 들어맞는 해석이다. 강자는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멸시할 뿐이다. 주차장에서, 백화점에서, 비행기 안에서 갑(甲)질하는 ‘진상’들이 거기서 나온다.

 증오는 억압받거나 억압받는다고 믿는 약자들의 노여움에서 배태된다. 그 억압을 떼내고 붙일 고약이 없기에 치료가 어렵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종교적 증오보다 사회적 증오가 더 강력하고 심각한” 이유다. 러시아 정치철학자 미하일 바쿠닌 얘기다. 무정부주의자였지만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종교적 증오가 작살이라면 사회적 증오는 투망이다(이건 내 말이다). 작살이 보다 치명적이긴 해도 파급력은 투망만 못하다. 프랑스 사회가 미래를 보여줄 수 있었다면 청년들이 만평가들에게 삿대질만 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패한 사회가 테러리스트들의 불법어로를 눈감아주고 있다는 얘기다. 몇몇 원리주의자만 잡을 수 있는 작살 대신 좌절한 젊은이들을 떼로 끌어올리는 투망을 쓸 수 있게끔 말이다.

 멀리 프랑스에서 벌어진 총격 테러가 남의 일 같지 않은 게 그래서다. 종교적 갈등보다 사회적 갈등이 훨씬 더 큰 게 이 나라, 이 땅이다. 남 하는 꼴 눈 뜨고 못 보는 ‘쏠림’이 거기에 힘을 보태고 정보기술(IT) 강국의 인터넷·모바일이 가속을 붙인다. 그런 갈등의 고속도로에 올라탄 증오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결국 남은 건 충돌일 뿐이다. 시간만이 문제다.

 충돌은 예고 없이 발생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억눌린 채 내연하던 증오가 한 순간 권력(정치권력이든 경제권력이든)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때 일어난다. 흔히 경미한 충돌이지만 때론 꼬리를 무는 다중추돌일 수도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는 장치가 병목에 걸릴수록 충돌의 위험은 가파르다. 환란 이후 최고라는 20대 실업률로 갈 곳 없는 청년 초보운전자들이 몰려들면 위험은 더 커진다.

 권력층과 그 주변보다는 예술가나 극작가들이 충돌의 징후를 훨씬 먼저, 예리하게 감지한다. ‘미생’이라는 만화와 드라마가 그래서 나오고 영화 ‘카트’가 그래서 등장한다.

 통제 불가 절대반지를 손에 쥐려고 힘쓰는 경제권력은 자신이 증오를 증폭시키는 줄 깨닫지도 못한다. 갑질이란 용어가 상대적 박탈감이 만들어낸 이무기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쉬이 증오의 괴물이 된다는 걸 알려 하지 않는다. 청춘의 꿈을 볼모로 한 비용 절감에만 관심이 있다. 어느새 권력이 된 노조도 기득권 말고는 보지 못한다. 이를 바로잡아야 할 정치권력은 국정농단의 그림자를 지우는 데만 골몰한다. 반대권력도 제 편에 유리하게 끌어오려고만 애쓴다.

 이런 게 우리 모습이다. 끓어오르는 증오를 보지 못하고 저마다 제몫찾기에만 여념이 없다. 생각하면 아찔하다. 규모는 작을지라도 9·11 테러 못지않은 충격의 프랑스 사회도 사흘 전에는 이랬단 말이다. 서로가 가진 걸 조금씩 내놓는 게 필요하다. 그것도 늦으면 소용이 없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