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차기, 실적없는 빈손은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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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며칠 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이 함께 청계천을 둘러보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두 사람이 실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 없지만 속마음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시장 : 어떻소, 이게 내 작품이오.

박 대표 : 훌륭하네요. 축하드려요.

이 시장 : 내 실력을 인정했으면 이쯤에서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시는 게 어떠실지.

박 대표 : 글쎄요. 토건회사 사장 자리라면 기꺼이 양보하겠지만….

청계천 복원 공사는 이 시장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이명박 작품'이다. 착상의 기발함은 물론이요,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반발을 말끔하게 처리한 솜씨까지 이명박 특유의 체취가 풍겨난다. 이제 이 시장은 '청계천 새물맞이' 자축 행사로 사실상의 차기 대선 출정 팡파르를 울린다. 소리가 다소 요란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청계천'이란 실적(實績)을 들고 국민 심판대에 오른다.

그러고 보면 차기 대선에선 종전 같은 정치 이슈가 다소 빛을 잃고, 대신 후보자들의 실질적인 업적을 놓고 겨루는 '실적' 경쟁이 좀 더 눈길을 끌 것 같다. '민주화'나 '개혁'같은 정치 이슈에는 유권자들이 많이 식상해 있다. 혹자는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끝장 대결로 시대적 마무리를 하고 넘어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구도에선 미래의 비전이 안 보인다. '부패집단' '무능정권'등 헐뜯기의 옛 노래를 또 틀자는 건 고문이다. 국민은 새로운 노래에 목말라 있다.

차기 후보군으로 거명되는 면면들이 나름대로 만만찮은 실적을 쌓고 있는 점도 실적 대결의 가능성을 밝게 한다. 이들은 정국 운영, 장관직 수행, 지방자치단체 살림살이를 통해 이런저런 성과물을 손에 쥐었거나 만들어 가고 있다.

정치분야에선 박근혜 대표가 4.13 총선에서 탄핵풍에 휩쓸린 한나라당을 구원투수로 나서 회생시켰고,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공세를 야무지게 막아냈다는 실적을 평가받고 있다. 행정부에선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김근태.천정배 장관이 유리한 직책을 활용해 실적 쌓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고건 전 총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탄핵정국에서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실적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지자체에선 이 시장 외에도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미국의 인텔.쓰리엠, 일본 알박사(社)를 끌어들이는 등 모두 86건에 133억 달러의 외자 유치를 자랑하고 있다.

군부 집권이 끝난 뒤 치러진 그동안의 선거는 투쟁 경력, 지역 패권, 정치 경륜의 대결장이었다. 이렇다 할 생산적 실적 없이 입과 맨손에 의존한 바람의 결투였던 셈이다. 빈손으로 탄생한 정권이라 빈손의 허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실적 겨루기로만 선거가 진행된다면 사회적 화두부터 '척결.청산'에서 '생산.건설'로, '과거'에서 '미래'로, 보다 희망적이고 밝게 바뀔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지역구도가 여전하고, 이념과 계층.세대 간 갈등의 골이 깊은 우리 현실에서 그걸 기대하는 건 성급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적 경쟁의 비중을 높여 나가는 데서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차기엔 그게 현실화되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후보자들의 자각이다. 실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비전 제시로 선거에서의 모든 부정적 요소를 뛰어넘어 타 후보를 압도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현재까지 선보인 실적 중에선 '열린 청계천'과 '대북관계'가 돋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2년 이상 남은 대선에서 그 약발들이 어느 정도 먹혀들지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과잉 홍보로 효과가 반감될 수도 있고, 실적 내기에만 급급하다 역풍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적 겨루기는 지금부터가 중요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실적에 자신 있으면 관리를 잘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면 더 뛰어 작품을 만들어 내라. 미완의 작품이라도 좋으나 '빈손'으론 나설 생각을 말라.

다만 실적 만들기나 실적 홍보에서 속 보이는 행위는 금물이다. 민도가 높아졌고 민심의 입맛이 매우 까다로워졌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